나의 반달 - 한승엽 나의 반달 - 한승엽 손톱 밑살을 뚫고 펼쳐진 붉은 길 위에 여리고 투명한 반달이 떠 있다 마침내 정중동(靜中動)을 다 채우지 못한 미궁을 본다 멀리 기억을 폐기당한 스프링 별들이 보이지 않을 즈음에 가시처럼 돋아나는 아스라한 손톱의 핏자국들, 오래전 느닷없이 인간의 뿌리에 상.. 한줄 詩 2016.08.02
누가 오어사(吾魚寺) 가는 길을 묻는다면 - 정일근 누가 오어사(吾魚寺) 가는 길을 묻는다면 - 정일근 누가 오어사 가는 길을 묻는다면 마음이 내어주는 길을 따라가야 한다고 말해주리라 때가 되면 갈아야 하는 소모성 부품처럼 벌써 삶에서 너덜거리는 정체불명의 소리가 들려오고 일박의 한뎃잠으로도 쉽게 저려오는 가장의 등뼈 점점 .. 한줄 詩 2016.08.02
어느 대낮 스치는 생의 풍경 - 이선영 어느 대낮 스치는 생의 풍경 - 이선영 때로 트럭에서 떨어져내린 배추 몇포기가 아채장수로 하여금 대로를 무단횡단하는 모험을 감행하게 한다 그냥 갈 수도 있었다 고작 몇푼 안되는 것, 그렇지만 아직 멀리 온 것은 아닌데, 여전히 눈에 밟히는데 무 배추 가득 실은 소형 트럭에는 비상.. 한줄 詩 2016.08.02
오래된 슬픔 - 박미란 오래된 슬픔 - 박미란 사춘기가 올 무렵 처음으로 한 남자의 물건을 보았다 거무튀튀한 사타구니 사이에서 힘없이 세상 밖을 내다보던 그것 단단하던 그가 누가 우는 걸 그토록 싫어하던 그가 장성 도립병원에 누웠을 때 가까운 사람들이 제일 먼저 그를 떠나갔다 밤새 울부짖다가 잠든 .. 한줄 詩 2016.08.02
습관을 생각함 - 윤제림 습관을 생각함 - 윤제림 친정에 다니러 온 딸과 엄마가 마루 끝에 나란히 누워 서로의 얼굴에 부채질을 한다 치우지 못한 여름 습관이다. 무슨 이야기 끝인지 한 사람이 운다 나쁜 습관이다. 오래 울진 않는다 해가 짧아졌구나, 저녁 안쳐야지 부채를 집어던지며 일어선다 엄마의 습관이.. 한줄 詩 2016.08.02
내가 죽어 보는 날 - 조오현 내가 죽어 보는 날 - 조오현 부음을 받는 날은 내가 죽어보는 날이다 널 하나 짜서 그 속에 들어가 눈을 감고 죽은 이를 잠시 생각하다가 이날 평생 걸어왔던 그 길을 돌아보고 그 길에서 만났던 그 많은 사람 그 길에서 헤어졌던 그 많은 사람 나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 나에게 꽃을 던지는.. 한줄 詩 2016.08.02
연애의 그늘 - 박연준 연애의 그늘 - 박연준 내가 아래로 아래로 떨어질 때 입술은 위로 위로 흐르리 역방향으로 흐르는 비틀린 빨강이 허공에 핀 찰나의 꽃이라고 생각하리 포옹이 오래 고이면 몸은 하나의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손가락은 사물을 가리키는 막대로 전락하고 손톱은 가장 딱딱한 미소를 .. 한줄 詩 2016.08.02
버스 정류장 - 이미자 버스 정류장 - 이미자 손톱으로 누르면 무른 한낮이 복숭아처럼 으깨진다 나는 여전히 연애는 신파라고 생각하지만 떠나간 남자가 신문을 펼치면 전단지처럼 몰래 눈물을 끼워넣을 줄도 안다 버스는 늦게 온다 진부한 깨달음이 그러하듯 흙탕물이 얼룩진 사월의 평상에게 썩어가는 꽃들.. 한줄 詩 2016.08.01
누가 사는 것일까 - 김경미 누가 사는 것일까 - 김경미 1 약속시간 삼십분을 지나서 연락된 모두가 모였다 우리는 국화꽃잎처럼 둥그렇게 둘러앉아서 웃었다 불참한 이도, 더 와야 할 이도 없었다 식사와 담소가 달그락대고 마음들 더욱 당겨앉는데 문득 고개가 들린다 아무래도 누가 안 온 것 같다 잠깐씩 말 끊길 .. 한줄 詩 2016.08.01
바람의 딸 - 김사이 바람의 딸 - 김사이 어느 날 학교 파하고 돌아오니 안방에 아버지를 닮은 낯선 할머니가 앉아 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친할머니라 한다 등허리로부터 소름꽃이 토도독 피어오르고 놀라 엄마, 엄마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평온한 시간이 지루했던 모양이다 푸른 태양이 숨어버리고 그렇.. 한줄 詩 2016.08.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