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길이 아닌 길 - 이선영

마루안 2016. 5. 9. 23:00



길이 아닌 길 - 이선영



저렇게 잘 닦인 길이 왜 내 길이 아닌가?고
눈에 한참 밟히던 길이 있었다
아마 원주나 제천 가는 길목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때 줄지어 가는 차들의 행렬에 끼여 있었다
세상엔 내가 알거나 모르는 수많은 갈래의 길이 있지만
그 길들은 그저 멀거나 조금 가까운 갈랫길일 뿐
내가 밟고 가는 길은 늘 하나의 길일 수밖에 없다
흔한 발자국들 찍힌 세상의 흔한 길들 중 하나가 될지라도
저 의젓한 길은 어디로 향하는가,
여직껏 나와 다른 길을 밟아온 길,
내게서 멀지 않은 거리에 있으면서 그러나 나와는 다른 곳을 향해 가고 있는
저 길은 어떤 까닭으로 이리로 이어져서 어떤 추억과 상처의 바퀴를 굴리기 위해 벋어 있는가,
저 길을 통해 다다를 수 있는 곳은 낯선 천국이라는 것인가 아니면 낯선 오지라는 것인가, 저 길은
가는 길이 아니라는 것이다
단 한걸음도 들여놓지 못할 그 길을
나는 한동안 가슴에 담았었다
내 갈 길이 아닌 그대를



*시집, 일찍 늙으매 꽃꿈, 창작과비평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 이선영



나는 선운사 동백이나 비슬산 참꽃이 아니다
고란사 홀로 숨어 피는 고란초는 더욱 아니다
나는 봄이면 담장 안에 흔히 피는 개나리이거나 목련일 따름이다
담장 안에서 고개만 비죽 내밀고 보이는 만큼만 세상을 구경하거나
더러 공원에 가면 사람들과 적당히 섞여 봄 한때의 정취를 나누기도 한다
도시의 한길가에서 탁한 공기와 매연을 마시는 일도 마다치 않아야 한다


나는 동백이나 고란초의 남다른 고고함 또는 남모를 고초에 관해 알지 못한다 알 리 없을 것이다
나는 흔하디흔한 시정의 꽃으로 꽃 피워왔으며
그렇게 피고 지는 것밖에는 알지 못한다


다만 나는 꽃 피어 있음의 한편 희열과 한편 슬픔, 환멸을 알 뿐이다
개나리 목련으로 꽃핀 데 그친 내 생이
생의 다가 아님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