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꿈꾸는 죽음 - 이창숙

마루안 2016. 5. 15. 21:50



꿈꾸는 죽음 - 이창숙



어둠을 메고 누군가 나를 스쳐가는 서늘함
뜯어먹던 빵 봉지 속에서 마른 풀잎처럼 겨울밤의
손목 시린 바람 울고
오늘도 구멍 뚫린 내 혀를 조금씩 이빨로 잘라 가는 그는 누구인가?
아무도 아픈 내 이름 위에 백합 한 송이 얹지 않으리
무덤이 생긴 뒤 잘려나간
내 혀 속에 핀 아름다운 꽃들이 웃고
웃을 일만 있는 죽음 물방울 맺히는
겨울밤의 찬 유리창을 보다 자정을 삼킨 거리의 풍경
아무도 없다 자동차의 낡은 경적 소리도 끊기고
비웠다가 지워지는 골목길 뜯어먹던 마른 풀잎이
빵 봉지와 함께 윙윙 어디론가 불려 간다
외롭고 배고팠던 짐승 한 마리
눕는다



*시집, <바람든 무, 내 마음에게>, 눈빛








길 - 이창숙 



어느 날 목선(木船) 같은 낮달이 뜨고 바람 없는 공중에 한 사람 한참이나 바라보다 그 길 아주 멀어 뒤척이다가 가만가만 끝간데없이 안개 속으로 길이 나 있음을 알아 가는


그 길 멀어도 밤낮으로 멀리 있어도 손끝 무디고 펜이 다 마를 때까지 내 목소리 내가 다 마셔 버릴 때까지 허공에 매달려, 매달리다 지치면 마른 삶의 허물을 벗고


어느 날 나풀나풀 날아가겠지 뼈만 남은 신발 공중에 걸어놓고






# 이 시집엔 온통 검은색으로 가득하다. 죽음은 가까이 할수록 긍정적인 법, 그러나 나와 한몸이 되는 순간 소멸하는 것이 죽음이기도 하다. 어릴 적 무당이 치는 징소리가 생각난다. 어린 마음에 서걱거리던 무당의 옷에서 소름이 돋기도 했다. 어쩌면 내 몸에도 절반쯤 무당의 피가 흐르는지도 모르겠다. 비록 아주 저렴한 인생이지만 살아있음이 참으로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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