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어느날 장미는 선인장처럼 - 이응준

마루안 2016. 5. 28. 00:20



어느날 장미는 선인장처럼 - 이응준



어떤 자를 영원히 용서해서는 안되겠다고 마음먹은
1월의 눈 내리는 정오
나는 모래내다방 구석에 혼자 앉아 창 밖 거리를 내려다본다
여기 분위기는 왜 꼭 80년대 같을까 어머니와
단둘이 지내던 병실에서의 날들을 생각한다
내가 밀어주던 휠체어와 내가 읽어주던 성경구절들과
그것밖에는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던
약냄새 지워지지 않는 시절


기왕이면 깨끗하고 조용한 침대 위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 결국에 당신과 나는
저 햇살처럼 상하기 쉬운 시간의 부스러기가
고통이 지나가다 우리에게 남긴 전부임을 깨달으며
불안하다 추억, 불길하다 또 그 얼굴
그렇게 속삭이고 말 텐데 나는


너무 오래
목마를 수 있어 그늘진 심장을 가진 선인장으로 지내왔고
제 아름다움에 지쳐 일찍 시드는 장미조차도 경멸했지만
그래도 기왕이면 장미보다는 선인장이 되길 원했다는
쓸쓸한 자랑으로
숨어 있는 우물 따위엔 기대고 싶지 않았다는
괴로운 혼자말로


사막에서도 힘센 낙타처럼
모래내다방에서 1월의 눈 내리는 정오를
툭툭 털고 일어나며
어떤 자를
영원히 용서하지 않기로 한다



*시집, 낙타와의 장거리 경주, 세계사








사해문서 - 이응준



내가 어둠의 두루마리에 핏방울로 적혀
사막의 모래벽을 향해
모로 누워 잠들어 있던 밤


단 한 마리뿐이던 낙타의 등에 죽음처럼 조용히 올라타고는
나를 유기한 채
달아난 사랑


당신을 몰랐겠지요
그때 내가
하얗게 눈뜨고 있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