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꽃의 속도 - 정병근

마루안 2016. 5. 15. 22:22



꽃의 속도 - 정병근

 


꽃이 저리도 타당한 이유는
캄캄한 밤을 아무도 모르게 걸어 와서
아침에야 문 앞에 환하게 당도하는
그 속도가
너무도 간곡하기 때문이다


미워할 수 없다는 것
당신이 장님이라 하여도
가장 그리운 속도의 황금률을
꽃은 알고 있다
아무도 모른다는 것


이별은 또 길고 문득 빨라서
발밑에 분분한 꽃잎,
종종 걸음 앞에 떨어지던 눈물을
어찌 내가 못 보았으리 손사래 치며
가장 슬픈 속도로 멀어져간 당신


꽃의 속도로 오고, 갈 때
길은 가없고 기다림은 하염없어서
눈썹 위에 한 세월 우거지는 것


오늘, 그립지 않은 당신
고속(高速)의 뻣뻣한 뒤통수 때문에
당신과 나는 더 이상 상봉하지 않는다
걸어서 안 가면, 만날 수 없다

 

*시집, 태양의 족보, 세계사

 






 

안부 - 정병근

 
 
언제 한번 만나자는 말
조만간 한잔 하자는 말
믿지 말자 전화를 끊으면서
그것은 내가 한 말이기도 했으므로
약속은 아직 먼 곳에 있고
나는 여전히 동문서답의 헛바퀴를 돈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일이
어디 약속 뿐이랴 뱉은 만큼
못다 한 말들 입 속에 바글거리고
만나면 만날수록 이별만 수북수북 쌓인다
그런 게 다 인생이라고 나는 제법
늙어서 흰머리를 툭툭 털면서
발톱을 깎으면서 안경알을 닦으면서
생각컨대, 나는 죄의 신봉자였으니
일기장은 날마다 내게 반성을 촉구했고
지키지 못했으므로 반성은
더 많은 반성을 몰고 왔다
나, 이윽고 죄 많아 빼도 박도 못하겠으니
그대 어디쯤 잘 계시는가 제법 늙었는가
이 꽃이 지기 전에
우리, 폐단처럼 꼭 한잔 하자






정병근 시인은 1962년 경북 경주 출생으로 동국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88년 <불교문학>을 통해 등단한 후, 비교적 늦은 나이인 2001년 <현대시학>에 작품을 발표하면서 시작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오래 전에 죽은 적이 있다>, <번개를 치다>, <태양의 족보> 등이 있다.


# 정병근 시인은 시도 잘 쓰지만 문단에서는 술을 잘 마시는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시인들이 대부분 술을 즐기는 편이지만 정병근 시인은 즐기는 정도가 아니라 함께 술을 마신 사람들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 정도다. 그래서 한국 시단의 3대 주마(酒魔)로 불린다. 시인은 아직도 시인협회 회원이 아니다. 이유인즉 언젠가 시인협회 야유회에서 만취한 정병근 시인이 원로 시인들이 줄줄이 앉아있는 자리에서 바지를 내리고 소변을 갈기는 바람에 분노한 원로 시인들이 그의 회원 가입을 금지했다고 한다. 그보다도 어쩌면 시도 못쓰면서 시인입네 하며 거드름 피운다는 원로들의 컴플렉스를 그가 건드리는 바람에 시인협회를 장악하고 하고 있는 원로 시인들의 심기가 꼬였는지 모른다. 어쨌든 한국 시인 중에 내가 좋아하는 열 명의 시인으로 꼽고 있을 정도로 나는 그의 시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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