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복사꽃 그녀 - 손진은

마루안 2017. 4. 10. 04:30

 

 

복사꽃 그녀 - 손진은

 

 

동풍이 팔랑거리는 그녀 치맛단 들어올리자

저 가려운 구릉, 골짜기는 온통 분홍살로 흐벅지다

오살할 년, 가슴팍을 향기의 칼날로 찍었나

천만 개의 입술로 핥았나

내 사내 풀린 눈동자는 분홍물살 보조개에 사정없이 휩쓸리는 중이다

햇살이 능선과 골짜기 다 훑어도 잡아챌 수 없는

화냥끼는 언제 맑은 그늘이 될까 싶잖은 처녀처럼 깊다

더욱 봄비가 저 살들의 다정(多情)을 돋굴 때

채곡채곡 물 재우다 비안개를 거느리다

구름그늘이라도 그 살에 쓸릴라치면 내 사내의 날 온통 갉아먹는 거다

오매 환장할 것, 환장할 것

내 사내 얼굴 목에도 바짓가랑이에도 마구 올라타 닝닝거리는 분냄새

그 보조개 물살로 웃어쌓는데, 어허

언제나 내 쪽은 소란하고 저쪽은 맑은 거다

어떤 아낙의 사주를 받은 늦바람이 단숨에 한 그릇 떠 자셨는가

바람의 목젖 아래로 봄향기가 진동하는 윤사월

저 분홍 입술에 새들이 깃들였음은

땅에도 노을에도 쓸리는 연분홍 깃털이 말해준다

삼백예순의 날과 밤을 즙으로 갈아 만든 날개 퍼득이다 날아간 새,

대엿새 지상에 내렸다가

슬쩍 다시 하늘로 노 저어 간 분홍배였다 그녀는

 

 

*시집, 고요 이야기, 문학의전당

 

 

 

 

 

 

영덕 복사꽃 - 손진은

 

 

해마다 불끈한 몸으로 찾아와

제 흥에 절어 몇 날 밤을 으스러질 듯 덮치고는

나, 가네

한 마디 속절없이 던지고 나가선

소식 없는

희끗한 머리칼의 사내도 사내려니와

그 사내 보내고서야 후끈 달아올라

 

팔과 다리, 허리통에까지

가녀린 몸 찢어 낳은 연분홍 어린 것들

햇살에 만지작이다 만지작이다

소리 없는 글썽임으로

번진 분자국으로

돌앉은 나지막한 치마폭의 어깨도

이 언덕엔 있거니

이 언덕엔 있거니

 

창수령 더디 넘는 뻐꾸기 소리

속절없이 산귀 적시는 봄날

 

 

 

 

# 손진은 시인은 1959년 경북 안강 출생으로 경북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198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으로 문단에 나왔고 1995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평론이 당선되었다. 시집으로 <두 힘이 숲을 설레게 한다>, <눈먼 새를 다른 세상으로 풀어놓다>, <고요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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