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겁 없는 골목 - 정병근

마루안 2017. 4. 4. 00:05



겁 없는 골목 - 정병근



빨리 살아버려야지


낡은 나무 문짝으로 굳게 닫아놓은 저 집의 내부는
한때 아이들 코 묻은 돈을 받아먹은 구멍가게였을 것이다
슬레이트 지붕 담벼락 밑에 맨드라미 채송화들
제발 건드려달라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빤히 쳐다본다


상추 고추 가지, 딱 한 포기씩 심은
화분들 옹기종기 나앉아 있는 길가
비닐 장판을 깐 마루에
늙은 아주머니 몇이 도란도란 소문을 만들고 있다
걷어붙인 치마 속, 살이야 보이든 말든


얼마다 답답했으면
한 평도 안 되는 우리에 갇힌 누렁개 한 마리
침을 질질 흘리며 죽여달라고 안달이다
개새끼들 내 인생을 물어내라고
쳐죽일 놈들이 한둘이어야 말이지



*시집, 번개를 치다, 문학과지성








유리의 技術 - 정병근



유리창에 몸 베인 햇빛이
피 한 방울 없이 소파에 앉아있다
고통은 바람인가 소리인가
숨을 끊고도, 저리 오래 버티다니
창문을 열어 바람을 들이자
햇빛은 비로소 신음을 뱉으며 출렁인다
고통은 칼날이 지나간 다음에 찾아오는 법
회는 칼날의 맛이 아니던가
깨끗하게 베인 과일의 단면은 칼날의 기술이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풍경의 살을 떠내는
저 유리의 기술,
머리를 처박으며 붕붕거리는 파리에게
유리는 불가해한 장막일 터,
훤히 보이는 저곳에 갈 수 없다니!
이쪽과 저쪽, 소리와 적막 그 사이에
통증 없는 유리의 칼날이 지나간다
문을 열지 않고도 안으로 들이는 단칼의 기술,
바람과 소리가 없다면 고통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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