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만경강 트로소 - 서규정

마루안 2017. 3. 30. 22:48

 

 

만경강 트로소 - 서규정


내세는 있는가, 대체 어느 서쪽일까

온갖 트집을 잡듯이 물결은 굽이치며 출렁이고
굵은 모래가 은하처럼 빛나던 그 강가
장날 팔려나온 닭, 싸움시키다 만나
발음도 시원치 않게 구구절절 외워온 팝송 부르며
볏짚가리 속에서 몇 밤 같이 새운
우리 사건쯤이야, 연극 제목으로 골라 따로 쓸 건 없어도
마른수수깡 씹듯 복수의 이빨은 갈았겠지
시골구석에서 흐느적거리며 살 순 없어
배우가 되겠다고 나서던 등 뒤에서
연극이나 시, 하필이면 밥도 안 되는 것만 찾아
술은 먹는다
앞 강 모래 파, 벽돌 찍어 팔면 그럭저럭 밥은 먹는다
남잔 벼락을 잘 만나야 목발도 날개가 되는 거야
생활을 해야지, 왜 서커스를 찾아 가
놔라 팔 부러진다
역에 나와 팔을 붙들던 화장기 없는 살림꾼 하나
가물거리던 풍경의 속도로 죽여 놓고선

지금도 끔먹끔먹 팔이 아파
붙들릴 팔도 없었으면, 이별도 없었을
그 강마을로 가려면
아예 두 팔을 쑥 뽑아버리고 가야할, 내세라는 경계는 어디


*시집, <그러니까 비는, 객지에서 먼저 젖는다>, 작가세계

 

 

 



프라하의 연인 - 서규정


위층에 혼자 살던 삼십대 남자가, 죽은 지 딱 한 달 만에
발견되었다, 촛불까지 꽂은 건 아니나 온방을 술병으로
둘러 쳐놓고 엎드린 채로,
운구차가 도착하고 아파트 입구가 소란스럽다
서 있기조차 떨리는, 나는 지금 말뚝 출신 그림자인가
그림자 출시 말뚝일까
그의 벽엔 달력 한 장과 몇 번이나 재방영된
'프라하의 연인' 화보가 나란히 걸려 있었다 한다
인사는 따로 없이 가끔 슈퍼에서 캥한 눈과 눈끼리
소주병을 들고 달그락달그락 부딪치며 만나긴 했었으나
이승의 고통을 건너 또 다른 세상의 고행을 찾아
이리 비틀 저리 비틀, 술에 술로 가다가 죽는 그 자리

遷化(천화)*란 과연 그런 것인가, 남의 일만 아닌 것 같다

술을 깰 때가 더 독하다
실실 실안개 같은 게 삐져나오던, 가슴이 무덤이었을 것이다

저절로 깨무는 빠진 어금니가, 삶의 악센트란 생각이 잠시 스쳐


*遷化(천화): 덕이 높은 스님이 이승의 고행을 마치고 다음 세상의 고행을 찾아 간다는 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