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에 들르다 - 이병률
내 전생을 냄새 없고 보이지 않는 것으로 살았다면 서쪽으로 서쪽으로만 고개를 드는 바람이었을 것이고
내 전생에 소리 내어 사람 모은 적 있었다면 노인의 품에 안겨 어느 추운 저녁을 지키는 아코디언쯤이었을 것이고
그 전생에 일을 구하여 토끼 같은 자식들을 먹여살렸더라면 사원에 연못을 파며 땟국 전 내력을 한스러워하는 노예였을 것이고
그 전전생에도 방랑을 일삼느라 한참을 떠돌았다면 후생에라도 다시 살고 싶어지는 곳에 돌 하나 올려놓았을 것이고
하여 이 생에서는 이리도 무겁고 슬프고
*시집,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문학동네
생의 절반 - 이병률
한 사람을 잊는데 삼십 년이 걸린다 치면
한 사람이 사는데 육십 년이 걸린다 치면
이 생에선 해야 할 일이 별로 없음을 알게 되나니
당신이 살다 간 옷들과 신발들과
이불 따위를 다 태웠건만
당신의 머리칼이 싹을 틔우더니
한 며칠 꽃망울을 맺다가 죽은 걸 보면
앞으로 한 삼십 년쯤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아는데
꼬박 삼십 년이 걸린 셈
이러저러 한 생의 절반은 홍수이거나 쑥대밭일진대
남은 삼십 년 그 세월 동안
넋 놓고 앉아만 있을 몸뚱어리는
싹 틔우지도 꽃망울을 맺지도 못하고
마디 곱은 손발이나 주무를 터
한 사람을 만나는 데 삼십 년이 걸린다 치면
한 사람을 잊는 데 삼십 년이 걸린다 치면
컴컴한 얼룩 하나 만들고 지우는 일이 한 생의 일일 터
나머지 절반에 죽을 것처럼 도착하더라도
있는 힘을 다해 지지는 마오
# 지금까지 읽은 이병률의 시 중에 위 두 편을 대표작으로 생각한다. 읽을수록 새로운 맛이 우러나는 시다. 전생을 믿지 않지만 이 시를 읽고나면 행여 후생에라도 시 읽는 호사쯤은 누리게 해줬으면 하는 바램 정도다. 분명 어긋날 테지만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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