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울림 혹은 떨림 - 조항록

마루안 2017. 11. 15. 22:43

 

 

울림 혹은 떨림 - 조항록

 
 

줄마다 끊어지고 녹이 슨
낡은 기타를 버리지 못하는 까닭은
공명 때문이라네
한때는 음악이었으나, 그리하여
때론 독주이고 때론 반주였으나
이젠 빈 몸통뿐인 생애
무릎에 점점 물기가 말라가는
친구들이 목련 꽃잎처럼 모여 앉은 날
기타는 홀로 줄 없는 연주를 하네
기타는 몸통을 빠져나온 파장이
어깨를 툭 치거나 가슴을 쓱 쓰다듬거나
헛기침을 시키거나


낡은 기타 안에는
70년대와 80년대와 90년대의
푸른 노래들이 가득하지만
지금은 빈 몸통의 공명만 울리는 시절
울먹이는 손가락들이 허공에서 떨리는 때


 

*시집, 지나가나 슬픔, 천년의시작

 

 

 

 

 

 
노량진을 지나며 - 조항록

 

 

버스 안 키 작은 재수생의 옆구리에
<삶, 죽음, 영혼>이라는 제목의 책이 누워 있다
출판사도 저자도 들어보지 못한 이름들이었으나
그건 내가 과문한 탓임에 틀림없다


아니, 삶과 죽음과 영혼을 논하는데
그깟 낯선 이름들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심각한 건 그 옆구리가 수학과 영어의 자리라는 것
어두운 조명 아래라고 현실이 감춰지는 건 아닌데
노량진을 지나면 탁 트인 한강이 나올 줄 아는
그 순진한 시절은 덩치보다 큰 외투를 걸친다


아, 덩치보다 큰 외투를 걸치는 시절은 아름다워라
어느날 커다란 외투로도 피할 수 없는
매서운 추위가 있다는 걸 알 때까지만 아름다워라
노량진을 지나 만나는 탁 트인 한강은 인공낙원


아직도 그런 단어들을 안고 사는 청춘이 있다니
인생은 참 지독하기도 하다

 

 

 

 

# 조항록 시인은 1967년 서울 출생으로 추계예술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고 1992년 <문학정신> 신인문학상에 당선되면서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지나가나 슬픔>, <근황>, <거룩한 그물>, <여기 아닌 곳>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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