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세련되지 못한 가을비 - 박석준

마루안 2017. 11. 15. 22:33

 

 

세련되지 못한 가을비 - 박석준


11월 가을비 한 방울씩 떨어지는데
어둑해가는 시가의 불빛들이 보인다.
낮게 깔린 상가의 불빛
아파트 고층 검푸른 빈칸에 점점이 찍힌 불빛.

집으로 가는 인도에서,
코너에 젖어 있는 은행잎들
-쓴 데도 없이 털려나간 돈.
-밥을 안 먹고 살아갈 수는 없을까.
-뜬금없이 여름휴가, 후지산
등산하러 갔다던 변호사 제자의 얼굴
가라앉는다. 내가 사는 집 네 식구들, 가을비

우우우우 우우우우우
소방차 사이렌 소리, 비가 오는데
머릿속에 들어선 내가 빌려 사는 아파트.
몸에 소름이 돋는다.
-집 쪽이 아니구나. 상가 쪽인가?
-불빛들, 어디서 불이 났을까?
그대로 비 젖은 인도를 걷는다.

사람같이 살려면 여러모로 돈을 써야 하는데
아빠, 나 메이플 하고 싶어. 자본이 필요해.
-세련되지 못한 수입원. 그저 그럴 뿐일 걸
불을 끄고, 잠이 들기 전, 연산을 해본다.


*시집, <카페, 가난한 비>, 푸른사상사

 

 




가을의 오전 - 박석준


길을 걷다가 문득
가을의 오전이 목욕하고 있는 모습을 본다.
낮 열두 시가 되면 곧 사라지겠지만
그때까진 시간을
신록처럼 깨끗하게 만들어
행인들을 낯설게 할 것이다.
살짝 내리는 비가 햇살처럼 가로수 밑동까지 닿는다.
햇살은 노점의 바구니와 상점의 쇼윈도 속으로 스며들고.

밤이면 언제나 삶에 대해 질문을 만드는 카페는
2층 유리창문 안에서 잠들어 있다.
가을 오전의 거리엔
노점 아낙 바구니의 과일들을 낯설게 스쳐가는,
은행이나 슈퍼마켓으로 가는
사람들이 잠시 머물러 있을 뿐이다.

거리에서 가을 오전이 목욕하고 있을 때
초등학교 앞을 스치면
구멍가게 안 아이스크림이 특별히 떠오른다
이어 어디선지 모르게
소넌 하나가 따라와
함께 길을 걷는다. 이제라도
그 아이와 아이스크림 한 개씩
나눠 먹으며 걷고 싶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은
여름처럼 쉽게 떠나보내지 않는다.


 


# 박석준 시인은 1958년 광주 출생으로 전남대 국문과, 광주대 대학원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08년 <문학마당> 신인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카페, 가난한 비>, <거짓 시, 쇼윈도 세상에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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