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밤 - 김유석

마루안 2018. 2. 4. 20:55

 

 

밤 - 김유석

-기차

 

 

갈 수 없는 곳을 가보려 함이 아니다.

가차이 두고도 한 번 들러주지 못했던 곳,

이후론 영 찾아가지 못하게 될 줄 모르는 이제는 어쩜

기차가 서지 않을지도 모르는 그 곳으로 밤차를 탄다. 겨울,

마음이 온통 새허여질 때까지 기다려 떠나는 기차에도

미처 태우지 못하는 것들이 있어 옆자리는 비고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실려가는 듯한 막연함이

성에 낀 차창에 긋는 어렴풋한 불빛 속으로

함께 데려가 달라고 눈송이처럼 뛰어드는 것들의 철없는 객기를 달래며

일부러 먼 길을 도는 세월은 아직도 남은 꿈이 있다는 것일까

지나친 후에야 환히 비춰지는 길의 부단한 이음새 위를 달리는

기차를 타는 사람들이 문득 아름다워 보인다.

하객이 없어도 질주하던 힘을 풀어놓고 가는 몇 몇 역이름을 외우면

언젠가 한 번 만난 적이 있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는 저 중년이

다음 역이나 그 다음 역쯤

어눌한 사투리로 물어주지 않아도

내 가는 곳 알 것 같은데

멎은 시계 같은 얼굴들이 필름처럼 스치는 상행선 불빛에

언제나 조금 늦게 오는 것들에 위로받던 순간들이

껍질에 쌓여 속을 이룬 양파처럼 아려온다.

외로움을 견디려고 밤차를 탄 건 아니지만

제가 세운 줄도 모르고 남의 기다림을 엿보는

늙은 짐승의 눈빛 같은 산역(山驛),

허름한 보따리 하나 챙겨들지 않아도

내릴 곳이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따뜻할까.

그쯤 영 멎어버려도 좋을 것을

연착해서는 안 될 그 무슨 기약이라도 있다는 듯 기차는 서둘고

또 다시 벌레잠을 마는 나의 꿈을 흔드는 세월은

기차가 멎는 곳마다 종착역이지만

내가 내릴 곳은 이미 지나쳐 버렸는지도 모른다.

 

 

*시집, 상처에 대하여, 한국문연

 

 

 

 

 

 

먼 불빛 2 - 김유석

 

 

이젠 외롭다 중얼거려도 될까요.

멀리 있는 것들이 보이지 시작했으니까요

말꼬리를 흐리지 않고서도 삶을 이야기 할 수 있으니까요

 

한참 서 있었지요.

기다림이나 망설임의 자세는 아니었습니다.

피고 지는 풀꽃들의 생애 그러하다면

막연한 세월은 결코 아니었고요.

오래 전에 잃어버린 물건을 엉뚱한 곳에서 발견했을 때 만큼이나

좀 난감하고 허전할 뿐입니다.

 

아직 땅 맛은 모릅니다.

꽃 필 줄은 알아도 그 꽃 무심히 저버리지 못하므로

뿌리를 내린다는 일이

얼마나 아름다운 고통이어야 하는지 알 수 없지만

속잎만한 바람결에도 온 몸이 떨려옴은

몇 낱의 잔뿌리가 돋은 까닭일 겝니다.

 

눈이 내립니다.

오래 참아 가볍고 사소해진 생각들이

마실꾼들의 얘기소리를 들판에 첩첩 되묻어가는 밤,

외롭다는 말이 함정인 줄 알면서도

자꾸 함정에 빠져드는 건

버릴 수 있을 때 버리지 못한 것들이

저렇듯 멀리서 깜박거리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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