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흔적에 대한 보고서 - 이철경

마루안 2018. 2. 5. 19:12

 

 

흔적에 대한 보고서 - 이철경


유년의 한쪽 모퉁이 흔적인 양
X- Ray에 선명하게 찍힌 폐렴의 상흔이
깊은숨을 헐떡인다

짧은 봄 햇살 아래 새끼 고양이처럼
처마 밑에 앉아 졸고 있던 아이는
또래의 하굣길을 바라본다
약으로 허기를 때우는 점심나절
담장 아래서 일어난다는 것 자체가 두려움이다
파란 하늘이 갑자기 캄캄한 암흑의 소용돌이로
아찔하던, 그 찰나의 빈혈은 차라리 희열이다
검은 터널의 겨울이 가고
가뭄에 허덕이던 어지럼증처럼
내 잠에 비가 내리면
세상은 그나마 이스트가 첨가된 빵처럼 부풀어 오른다

그 짧았던 계절에 미처 따라가지 못한 몸은
끝내 긴 밤의 뒤척임처럼 똬리를 틀었지,
새벽까지 멈추지 않던 기침과
눈알이 빠질 듯, 뼈 마디마디 풀리듯
내 깊은 불면의 밤은
납작하게 뼈가 굳어버린 꿈속을 표류하는 심해어이다

아침이 다시 올 때,
간간이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환청처럼 들리면
피를 토하던 뒷산 소쩍새 울음소리도 그제야 멈추고
뼈만 남은 혼란한  몸뚱이는
간정된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안식을 취한다


*시집, 죽은 사회의 시인들, 천년의시작

 

 




봉인된 기억 - 이철경


한때는 가난이 철 지난 신문처럼
다닥다닥 붙어있던 시절,
무거운 신문을 허리에 끼고
어스름이 내리는 시골길을 달리다 보면
허기와 공포가 발아래까지 쫓아왔다
겨울이면 더 빨리 어둠이 내리는
해가 야속하기만 한,
듬성듬성 묘지 있는 산골 인가(人家)에는
포근한 연기와 함께
정겨운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사는 세상과 다르게 그곳에는
웃음과 함께 구수한 사람의 냄새
​그 따뜻한 미소와 반기는 손에 이끌려
​허기진 배를 채우면
그날 배달하다 남은 세상의 일들도
잠시, 긴 숨을 몰아쉰다
그렇게 도토리 주워 배를 채우던
다람쥐처럼 쳇바퀴 돈다
나의 뼈와 살은 내 이웃과의
인간에 대한 긍휼함으로 이루어졌음을,
비바람과 펑펑 내리는 눈도 알고 있다
나의 어린 친구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며

삼가 유년의 명복을 빕니다.


 


# 이철경 시인은 1966년 전북 순창 출생으로 고려대 대학원 문예창작(시 전공)과를 졸업했다.  2011년 계간 <발견> 신인상 당선과 계간 <포엠포엠> 평론상을 수상했다. 3회 목포문학상을 받았다. 시집으로 <단 한 명뿐인 세상의 모든 그녀>, <죽은 사회의 시인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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