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마부의 아들 - 정원도

마루안 2018. 2. 4. 23:36



마부의 아들 3 - 정원도



한여름 진한 담뱃내에
땀내 절은 아버지가 밤이슬 털며
사과궤짝 가득 실은 마차를 끌고 돌아왔다


삐걱대는 마차를
늦둥이 아들 옆에 태우고 채찍질하던 길
쉴 새 없이 달라붙는 파리 쫓기에 바쁘던
긴 말총 어린 뺨 따갑게 후려쳤다


새하얀 새끼 보에 싸인 채
쏟아진 망아지를
촉촉이 젖은 눈길 긴 혓바닥으로 핥아주면
기를 쓰고 뒤뚱거리며
보를 찢고 일어서던 힘


별빛이었는지 달빛이었는지
팍팍한 고개 넘던 말발굽소리에
요령소리 동무 삼아
새벽 먼 길 떠나던 아버지의 등을


어둑한 창호지문 너머로
어른거리던 잠결에 다 보았다



*시집, 마부, 실천문학사








육백을 치다 - 정원도



마부일도 들일도 뜸한 삼동三冬 한 때에는
뜨끈뜨끈한 아랫목에 둘러 앉아
새마을 담배 개비 내기에
두부내기 육백을 쳤다


일정 때나 난리 통 얘기로
깊어가는 밤을 채근하는 것이
그들 한담의 본론이며 까닭이어서
징용 안 끌려가려고 병신 노릇했던 것이
해방이 되고도 이름이 되어
장 병신으로 불렸다는 점백이 아재 무용담


장터 배씨집 노쇠한 말이
너무 부려먹어 병이 들었는지
끝내는 주저앉아 도살당했다는 소문에
득달같이 달려가 아버지가 얻어온 말고기
어둠 까마득한 마당에 화덕이 차려지고
피 철철 떨어지는 말고기 고추장 발라 굽는
말걸리 추렴에
매캐한 담배 연기가 골방 가득 자욱했다


오난 시름이 한 바람에 녹아 내려
모처럼 마부의 채칙도
노독路毒을 풀던 밤이었다





# 마부라는 아버지의 직업과 그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아들의 착한 심성이 드러난 시다. 당시에야 그것을 당당하게 드러내고 싶지 않을 때도 있었겠지만 세월이 흘러서야 아버지와 아들의 끈이 운명이었음을 알았을 것이다. 어쩔 것인가. 내가 이 세상에 나온 것부터가 내 의지와는 상관 없는 운명이었으니,, 바닥까지 내려가 본 사람일수록 곱씹어 읽을 만한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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