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아직도 아궁이 불빛이 - 조길성

마루안 2018. 2. 18. 17:25



아직도 아궁이 불빛이 - 조길성



한겨울
문고리 함부로 못 만지는 마음이
쩍쩍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방문을 열면


손톱으로 이를 잡아 터뜨리는 오도독 오도독 소리에 놀란
싸라기눈이 슬레이트 지붕 위를 벼룩처럼 뛰는 밤


아궁이 불빛이 괄게 타오르면
가마솥 끓는 소리가 기관총 소리를 닮았다고
개들이 사람고기를 뜯어 먹고는
철버덕철버덕 고인 물을 양껏 먹는 걸 보니
사람고기가 짜기는 짠 모양이라고
이미 기차에 몸을 싣고
청천강 쯤 건너고 있는 눈빛으로
할머니 한 분 중얼거리며 앉아 있고
고양이와 강아지가 한 마리씩 그 곁에 서로 모르는 척 앉아있고


기차가 잠시 머문
봉천이나 장춘쯤에서
봄으로 가는 문고리를 만지작거리는
나이 오십을 바라보는 사내가
아궁이 불빛을 들여다보고



*시집, 나는 보리밭으로 갈 것이다, 도서출판b








아무 데나 - 조길성



술국이 맛나게 끓고 있는 해장국집을 들어설 때나
질척거리는 진창길 지나 불빛 흐린 여인숙 현관문을 들어설 때
지나는 고운여자 뜻 모를 웃음에 홀려 길을 잃는 오후에도
내 집은 바람 속에 있다


어델 가랴 가도 가도 끝없는 길 위에서
고향은 언제나 변두리 버스정류장이고 시외버스터미널이고
간이역 햇살 환한 기차정거장 출발 오 분 전
처마 끝 배추시래기에도 뿌리의 기억이 새롭게 눈뜨는 저녁
낯익은 골목 밥 짓는 냄새에 살을 데이며
길 떠나야지
어느 생이 다시 온다 해도 만날 수 없는 그리움이 모르는 누구의 마당을 향하는데






# 시인은 두 번째 시집에서 훨씬 더 외로움은 탄다. 떠난 것들은 다시 돌아올 수 없지만 지난 추억을 돌아보게 만드는 이런 시가 있어 겨울밤이 포근하다. 삭막한 인생에서 돌아볼 추억마저 없다면 인생이 얼마나 황폐할 것인가. 시인의 말이 긴 여운을 남긴다.


시인의 말


그나마 마음 주고자 노력했던 세상 모든 고향들이 나를 버리고 떠나가고 있다.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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