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새의 생 - 김추인
-모래가 키우는 말
사막에 서면
고향 언덕 같아 주저앉고 싶다
끝도 없는 모랫벌
바람치는 벌판이 내 속만 같아서
그 휑한 가슴 껴안고 싶다
혼자가 아니라도 홀로인 시간
죽을 만큼 쓸쓸해서
눈뜰 씨알조차 없이 마르는 땅 있다
가시풀 음지의 살 틈에
전갈이나 키우는 불모의 땅 있다
사막의 정오
열사뿐인 모래의 불길 속을
막창자 꼬리까지 탱탱한 독을 뻗쳐들고
전갈들이 질주한다
비로소 사막에 길이 난다
누가 알 것인가
내 열두 늑골 뗏장 밑에 엎드려
향방 없는 일상의 사막 가운데로
때없이 날 내달리게 하는 독푸른
전갈 한 마리를
*시집, 모든 하루는 낯설다, 세계사
보증 또는 보류 - 김추인
증을 믿는 사람들에게 실체는 허수아비다
생애의 중요한 일마다 앞에 나서서 콩이다 팥이다
증거하고 보증 서는 너는
증명사진이란 함자를 가지고 계시구나 그렇구나
엄지손톱만한 것이 테두리 속에 모셔져 내 것 같지도 않은 굳은 이목구비를 박제하고 있다니
내 심술이며 장난기, 미소 어땠어? 말해 말해--
실물을 제쳐두고 날 증언하겠다? 네가 없으면 내가 증명되지 않는 세상은 아예 덫이로구나 개똥이로구나
나 죽어도 너는 남아 확장된 면상에 검은 띠를 두르고 피끓이던 내 생애도 증언한다 하니
순 꽝이로구나
나는 소각되고 너는 남아
# 김추인 시인은 1947년 경남 함양 출생으로 연세대 교육대학원 국어교육과 석사과정을 졸업했다. 1986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광화문 네거리는 안개주의보>, <벽으로부터의 외출>, <전갈의 땅>, <모든 하루는 낯설다>, <프렌치키스의 암호>, <행성의 아이들>, <오브제를 사랑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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