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틈새의 생 - 김추인

마루안 2018. 2. 18. 20:26

 

 

틈새의 생 - 김추인

-모래가 키우는 말

 

 

사막에 서면

고향 언덕 같아 주저앉고 싶다

끝도 없는 모랫벌

바람치는 벌판이 내 속만 같아서

그 휑한 가슴 껴안고 싶다

 

혼자가 아니라도 홀로인 시간

죽을 만큼 쓸쓸해서

눈뜰 씨알조차 없이 마르는 땅 있다

가시풀 음지의 살 틈에

전갈이나 키우는 불모의 땅 있다

사막의 정오

열사뿐인 모래의 불길 속을

막창자 꼬리까지 탱탱한 독을 뻗쳐들고

전갈들이 질주한다

비로소 사막에 길이 난다

 

누가 알 것인가

내 열두 늑골 뗏장 밑에 엎드려

향방 없는 일상의 사막 가운데로

때없이 날 내달리게 하는 독푸른

전갈 한 마리를

 

 

*시집, 모든 하루는 낯설다, 세계사

 

 

 

 

 

 

보증 또는 보류 - 김추인

 

 

증을 믿는 사람들에게 실체는 허수아비다

 

생애의 중요한 일마다 앞에 나서서 콩이다 팥이다

증거하고 보증 서는 너는

증명사진이란 함자를 가지고 계시구나 그렇구나

엄지손톱만한 것이 테두리 속에 모셔져 내 것 같지도 않은 굳은 이목구비를 박제하고 있다니

내 심술이며 장난기, 미소 어땠어? 말해 말해--

실물을 제쳐두고 날 증언하겠다? 네가 없으면 내가 증명되지 않는 세상은 아예 덫이로구나 개똥이로구나

나 죽어도 너는 남아 확장된 면상에 검은 띠를 두르고 피끓이던 내 생애도 증언한다 하니

순 꽝이로구나

 

나는 소각되고 너는 남아

 

 

 

 

# 김추인 시인은 1947년 경남 함양 출생으로 연세대 교육대학원 국어교육과 석사과정을 졸업했다. 1986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광화문 네거리는 안개주의보>, <벽으로부터의 외출>, <전갈의 땅>, <모든 하루는 낯설다>, <프렌치키스의 암호>, <행성의 아이들>, <오브제를 사랑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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