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사랑은 - 이승희

마루안 2018. 2. 19. 18:23



사랑은 - 이승희



스며드는 거라잖아.
나무뿌리로, 잎사귀로, 그리하여 기진맥진 공기 중으로 흩어지는 마른 입맞춤.


그게 아니면
속으로만 꽃 피는 무화과처럼
당신 몸속에서 오래도록 저물어가는 일.


그것도 아니면
꽃잎 위에 새겨진 무늬를 따라 꽃잎의 아랫입술을 열고 온몸을 부드럽게 집어넣는 일. 그리하여 당신 가슴이 안쪽으로부터 데워지길 기다려 당신의 푸르렀던 한 생애를 낱낱이 기억하는 일.


또 그것도 아니라면
알 전구 방방마다 피워놓고
팔베개에 당신을 누이고 그 푸른 이마를 만져보는 일.


아니라고? 그것도 아니라고?


사랑한다는 건 서로를 먹는 일이야
뾰족한 돌과 반달 모양의 뼈로 만든 칼 하나를
당신의 가슴에 깊숙이 박아놓는 일이지
붉고 깊게 파인 눈으로
당신을 삼키는 일.
그리하여 다시 당신을 낳는 일이지.



*시집, 저녁을 굶은 달을 본 적이 있다, 창비








산수유네 집에 가다 - 이승희



아무도 살지 않는 집,
이 집에는 비어 있는 공중 같은 세월이
쓰러지지도 못한 채 단단한 껍질로만 서 있지.
언제나 저녁 강물 같은 쓸쓸함만이 밀물 드는 집 마당에
집의 내력과 한 생을 같이하는
산수유 한 그루가 힘겹게 꽃 피워 올린 이유
그 꽃잎이 자꾸만 얼굴을 그려대는 이유, 자꾸만 따뜻한 밥냄새를 피워올리는 이유
꽃잎에는 읽다 만 편지처럼, 두런거림이 입술처럼 달싹거리는 이유를
젖먹이처럼 필사적으로 나를 잡아끄는 그 마음 길에 끌려온 집


전생으로 이어진 길 있었을까?
햇살에 온몸을 담그고 있어도
온몸이 씀벅씀벅 아파올 때처럼
손가락 끝마디로부터
머리끝 잎사귀
끝까지 끝까지
다시 그 끝을 오래 밀어밀어 올리는
이 집의 내력 무엇일까?


중심을 잃고 나서야 비로소 바로 서 있을 수 있는 산수유가 사는 집. 무덤 속이 이럴까? 정말 나는 이 삶으로 소풍이라도 나온 걸까? 이 집의 안과 밖의 세상이 다르다. 영혼의 냄새가 낡은 세간마다 묻어 나오는 동안 나는 잠들어 조금 울었다.






# 시인의 첫 시집에서 뒤늦게 발견한 시다. 오래전에 스쳐갔던 시집이다. 시와도 인연이 닿아야 마음에 담을 기회가 있는 것인가. <산수유네 집에 가다>를 이 시집의 대표작으로 여긴다. 10년 만에 닿은 편지처럼 늦게 담은 마음이 애틋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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