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마루 밑 - 허림

마루안 2018. 2. 17. 12:23

 

 

마루 밑 - 허림


마루 밑,
누렁이가 새끼 낳으러 들어가기도 하고
쥐약 먹은 누렁이 거품 물고 뻘건 눈 부라리며
서서히 죽어가던

마루 밑,
햇살이 닿지 않아 더 어둡고 서늘하고
왼손잡이 할아버지 꾸불꾸불한 지팡이와
고집 센 검정 소 목덜미에 얹었던 멍에
삐딱하게 떠받고 있는

마루 밑,
허물 같은 생의 거처는 남아있는가
뭉툭한 호미 날이나 부러지고 이 빠진 낫 모질뱅이 숟가락 깨진 대접 볼펜에 끼워 쓰던 몽당연필 눈알 같은 유리구슬 국어 책 겉장으로 접은 딱지 몸통뿐인 기타 무궁화 꽃이 선명한 1원짜리 하얀 동전 어머니한테 대들다가 떨어진 것 같은 단추 빠져 들어간

마루 밑,
먹구렁이 울음
웅숭깊은 어떤 기억


*시집, 노을강에서 재즈를 듣다, 황금알


 

 



굴뚝 - 허림


마른 연기 피어오르는 굴뚝 보면
왠지 그 방 아랫목에 눕고 싶다
바람에 치이고 사람에 치인 허리 지지고 싶다
청동화로에 감자 서너 개 구워 먹고 싶어진다
메줏내 퀴퀴하게 맡으며
하느님보다 무섭던 할아버지를 만나고 싶어진다
수염이 잘 어울리고 눈이 부리부리 했던
왼손잡이에 시조창을 읊던
청산리 벽계수 다시 흘러오지 않지만
왠지 알싸한 냉괄 내 배인
그 뜨뜻한 아랫목에 벌렁 눕고 싶어진다
신문지로 척척 발라놓은 천장
쥐들이 줄달음치고 더러 쥐 오줌이 베인
뭣보다 그날 불었던 샛바람과
햇빛 속으로 뛰어들고 싶다
내처 달려 들어가 아궁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불알 늘어지게 따뜻해지고 싶다

 



마루 구멍 - 허림


옹이 빠진 마루 구멍의 저 안쪽
거미줄 사이 한 세상 풍경이 자막처럼 흔들리는
시간의 잔잔한 자서전
오래 전에 잊은 상형문자 같은
끈적거리는 비밀이 우우량량 떠돌던 적막을
걷다가 걷다가 굳은살 깊은 까치눈
생의 중심을 쿡쿡 치밀면
밑줄 친 문구처럼
혹은 빈칸에 남아있는
나의 부재를 또 확인하고 싶은 저녁
어쩌면 한 번 더 신고 버리려 했는지 모를
버려도 좋고 잃어버려도 괜찮은 기억의 언어였을
반쯤 뒤축이 구겨진 길의 내막
뒤꿈치 욱신거리는 길
바닥의 구멍
저 안쪽




# 허림 시인은 강원도 홍천 출생으로 강릉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1988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1992년 <심상> 신인상 당선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신갈나무 푸른 그림자가 지나간다>, <노을강에서 재즈를 듣다>, <울퉁불퉁한 말>, <이끼, 푸른 문장을 읽다>, <말 주머니>, <거기, 내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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