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저녁 시간의 의자 - 황학주

마루안 2018. 2. 21. 22:55



저녁 시간의 의자 - 황학주



물이 도는 곳으로 돌아와서 좋다


혹시 몰라 복대를 한 휘고 구부러진 슬픔이
내 등에서 따뜻해지는
자기 것 같은
자기 생머리 같은 시간들


전등을 잠시만 끄고 발아래 파도소리를 맞아도
있고 없는 것이 자리를 바꾸는 것일까
마음의 못생긴 의자에 돌아와
옷가지를 걸어놓는
주름 깊은 어둠
물기가 만져지는 이런 것들이
먼먼 바깥처럼 눈에 익는다
나는 아무도 없는 마음에 있고
또 그게 너무 많았다는
편지를 쓰며
날마다 바다 쪽으로 이사를 했다


어느 이별은 꼭 데리고 살면서 잘해주었다
바람 부는
어느 날 가출은 꽃가루처럼 복수인 구석이 있었다
이만큼 비워질 때까지 서서 지냈으니
구사일생, 그 말이 맞다


착 달라붙어 살겠다고
미친 것처럼
마음이 가던 날들을 떠올리곤
저녁시간의 의자는 목을 젖히며 까닥까닥 흔들린다



*시집, 某月某日의 별자리, 지혜








당신 빼고는 다 지겨웠어 - 황학주



이름 말고는 적어 넣을 수 없는
이름만으로도 밖으로 넘치는
절룩이는 생각의 의자에 앉아


빠지고 가늘어지는 머리카락을 단념하듯이
점점 이름을 까먹다 가는 사정이
기분 나쁜가?
나이를 몇 살 줄여준다 해도
달라질 게 없는데


쓰러진 의자를 다시 세우며
이름이 가장 어려운 날을 내가 산 것인지
가만히 창밖을 보고 있는 동안


더러더러 눈에 띄는 머나먼 시간이여
어느 하늘가로 미루나무 이파리처럼 뒤집히며
내 사랑의 행인 흐려지네


저리도록 기울여 앉아
다리가 흙에 묻히도록 빠져들던 생각의
허름한 의자를 집 앞에 내놓는 동안
나는 나의 끝나지 않은 무명(無名)이었다
사랑이 역광이 되는 거기까지는 말없이도 통한다
이름이 하나 다리에 못을 친
내 작은 지상 동그란 무덤까지


당신 빼고는 다 지겨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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