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일요일, 전철 4호선 - 윤석산

마루안 2018. 2. 20. 21:52



일요일, 전철 4호선 - 윤석산



더운 지방에서 온 그들에겐 이제 막 다가온
겨울이 너무 춥다.
목이 긴 장갑이며 귀마개까지
서울로 가는 4호선 일요일 전철 안
피부가 다른 사내들 이젠 그리 어색하지만은 않다


차창 밖을 내다보며, 나뭇잎 성긴 한국의 초겨울 풍경을 본다.
처음 맞는 겨울이 어떠한 것인지 아직 그들은 모른다.
한국이 제2의 고향이 될지, 아니면 무엇이 될지도
그들은 아직 모른다.


한 주일의 노동을 끝내고
구간 구간 멈추는 이름도 낯선 역에서는
꾸역꾸역 사람들이 내리고, 또 타고
사람들은 그저 무심코 그들을 한 번쯤 바라다볼 뿐


종착역 어딘가에 얼마나 혹독한 겨울이 웅크리고 있을지
그들은 알지 못한다.
목이 긴 장갑이며 귀마개로도
결코 이울 수 없는 또 다른 생 기다리고 있는지도
아직 그들은 모른다.


다만 서울이 '세울'인 줄로만 아는 그들.
한 주일의 노동의 피로가 아직 채 가시지 않은
일요일 아침, 서울로 가는 4호선
전철 안에는 이방의 언어로 나직이 낯선 저들만의 대화를 나누는
그들 거뭇거뭇 있을 뿐이다.



*尹錫山 시집, 나는 지금 운전중, 푸른사상








지하철 안, 문득 내 생의 연기(緣起)를 만나다 - 윤석산



어느 날 4호선 지하철 복잡한 사람들 사이에 선다. 헤벌려진 가방 안으론 아직은 쓸 만한 내 삶 들여다보인다. "이 칫솔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전동칫솔로 진짜 정품입니다요. 회사는 망하고 제품은 덤핑이 되어 여러분 앞에 섰습니다요." 아직은 덤핑이 되기 싫은 전동칫솔들 가방의 벌려진 입 사이로 계면쩍은 얼굴 내밀고 있다. 어느 생엔가 저렇듯 서서 떠들었을 나. 어느 생엔가는 덤핑인 채 가방에 담겨져 이 역 저 역을 전전했을 나.


오늘도 나 얽히고 설킨 세상 한복판에 선다.


아직은 쓸 만한 진짜, 진짜 정품들.
스위치조차도 한 번 눌려지지 않은 채 덤핑이 되어
꾸역꾸역 인연 보따리에 싸여
이 구간에서 저 구간으로, 이 생에서 저 생으로
전전하는
아, 아 내 생의 푸르디푸른 덤핑


나 오늘 문득 그렇게 만나버리고 만다, 그 덤핑의 연기(緣起)를






# 이 시를 읽고 緣起라는 단어를 정확하게 공부했다. 불교에서 온 말로 모든 과보(果報)는 인연에 따라 일어난다.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들이 무수한 원인과 조건의 상호 관계를 통하여 일어남을 이르는 말이다. 이 단어를 이해하고 나자 문득 오래전에 봤던 영화가 생각난다. <알렉산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이 만든 <바벨>이다. 세상엔 나와 관계 없이 생기는 일은 없다. 그러고 보니 세상의 모든 緣起도 어느 순간 煙氣처럼 사라지는 것,, 내가 해 놓고도 그럴 듯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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