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얼만큼 더 살아야 - 고운기

마루안 2018. 2. 20. 21:20



얼만큼 더 살아야* - 고운기



옛 시절, 휴대폰이 나오기 전
법대 건물 앞으로 아무 연락도 없이 찿아갔던 친구와는
신림동 어느 생맥주 집에서 대취(大醉)


도서관 꼭대기 층 대학원생 열람실
아무 연락도 없이 찿아왔던 여자와는
놀랍고 반가워 생애을 같이 하고자 작심(作心)


술이 깨니 세상은 하얗고
결코 내 뜻 아니었건만 작심은 삼 일이었네


내가 찿아갔으나 만나지 못한 친구와
나을 찿아왔으나 내가 자리을 비운 사이
쓸쓸히 돌아간 여자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김수희가 부른 <애모>에서.
*시집, 구름의 이동 속도, 문예중앙








새물이 들 때마다* - 고운기



그리운 만큼의 시간을
나는 사랑한다


떠난 사람도 돌아간 사람도 있다


그들이 생각나는 저물 무렵
골목을 돌아 모퉁이의 담쟁이 넝쿨이 벽에 붙은 계단과 함께 올라가는
오랜 찻집에 홀로 앉아 있다가


비슷한 나이를 살아온
전혀 다른 하늘 아래였건만
마치 한세상 함께 엮은 것처럼 여겨지는 어떤 사람에게
나는 천연덕스럽게 지난날을 털어놓겠다


밀물은 얼마나 많이
들어오고 나갔던가


그래도 또 무슨 그리움을 만들어줄 것처럼 이 저녁 새물이 들고 있다.



*이숙희가 부른 <부산 블루우스>에서.





# 오래 된 유행가에 시인의 추억을 잘 배합한 시가 술술 읽힌다. 오십대 이상 만이 오롯이 느낄 수 있는 시다. 시 뒤에 음악 갖다 붙이는 일 안 하려고 했으나 간만에 뽕짝 한 곡 덤으로 올린다. 시인을 향한 고마움에 대한 헌곡이다. 그리운 만큼의 세월을 사랑하는 시인은 분명 배호 노래를 좋아할 것이다. 이것도 다 내 맘대로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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