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아버지 소처럼 말씀하시네 - 정동철

마루안 2018. 6. 3. 18:05



아버지 소처럼 말씀하시네 - 정동철



눈송이 몇점 손님처럼 찾아간 날

더 이상 견딜 것도 더 탕진할 것도 없는 나는 집으로 내려갔다

굴뚝에서 쇠죽 끓이는 연기가 흰 팔뚝을 들어

눈 덮인 지붕을 버텨 올리는 참이었다

늙은 암소 등을 빗질하며 나직나직 하시는 말씀이 외양간 밖으로 새어나오는데

눈을 머리에 인 단풍잎들이 고개를 이기지 못하는 것을 고향집은 아는 것이다

구수한 쇠죽 냄새가 등을 토닥거려주자

처마 밑으로 녹다만 눈덩이 하나 툭 떨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염치 하나 툭 떨어져도


할 말이 없는 거다

푸우-푸 뜨끈한 여물을 먹으며

늙은 암소가 입김을 불어가며 메주콩을 씹더라도

이 세상 모든 구멍이란 구멍마다 후끈거리는 몸으로 가득하더라도,

소에게도 할 말이 없는 거다

그래, 겸연쩍게 얼굴을 들고 외양간 문을 엿보는데

부엌에서 저녁 짓다가 어머니 힐끗 보고 하시는 말씀

아서라,

느 아부지가 지금 소허구 말씀을 허신다


이 한 마디가

짚을 썰어 가마솥에 넣고 잘 마른 콩깍지와 쌀겨를 뿌리고

찬물 두어 동이 붓고는 풍구를 돌려가며 쇠죽을 쑤고 계시던 아버지를

외양 밖으로 불러내시는 것이었다


눈송이 몇 점 또 손님처럼 오시는 것이었다



*시집, 나타났다, 모악








청개구리 - 정동철



강 건너편에 서 계셨다

걱정스런 눈빛으로 이편의 나를

바라보고 계셨다

아버지 몰래 미역 감으러 나온 거 아니라고

중간치기를 한 것도

수박서리를 한 것도 아니라고

열심히 변명을 해댔지만 여전히

걱정스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계셨다

당신과 나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강물이 흐르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나 내 맘대로 살았다

아버지랑 반대쪽으로 걸으면서

지게 작대기도

불땀 나던 회초리도 잘도 피해 다녔다

삽과 괭이보다는 나무그늘을

성경책보다는 수음을 하며 나이를 먹었다


청개구리가 징그럽게 우는 밤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고 남몰래

대들던 별들이 오래도록 나를 따라오며 손가락질해댔다

뒤통수가 따갑도록

별빛들이 달그림자를 따라오고 있었다






# 정동철 시인은 1967년 전북 전주 출생으로 전북대를 졸업했다. 2006년 광주일보 신춘문예와 전남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2014년 <작가의눈> 작품상을 수상했다. <나타났다>가 등단 10년 만에 나온 첫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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