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우리 기쁜 절벽 - 서규정

마루안 2018. 6. 2. 22:00

 

 

우리 기쁜 절벽 - 서규정


서둘러 가는 것은 길이 아니라 도착이었다.
길가에 나온 사람들은 먼지 같은 이야기를 나누며
끝이 없는 길
잘 가라고 인사는 건넸다.

어디선가 직각으로 꺾일 것 같은 길 위에서
무엇인가 굴러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바람이 불고 덮였다. 꽃들이 피어났다.
사람들이 꽃처럼 피식피식 웃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지만 오래오래 덮이기를 바란다.

아직도 좁다. 성냥개비처럼
어둠 속에 갇혀 있다가 세상을 깜박 밝힌 죄로
스스로의 목을 매달고 처형된 불꽃,
무죄의 그늘이 흔들릴 때
숨어 있다
온 누리를 비치는 먼동이 되는 것.
아마 내일은,

땅은 쩡쩡한 햇빛에 의해 뜨거워졌으며
길들은 모두 활개를 치며 떠난다.
정오의 길은 늘어진 탓에 늦게 떠나지만
출발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기합 대신
고속도로가 되고 말았다.

우리가 바쁘게 가는 길은 푸드득푸드득 광고들이
놀라 깨어난다, 길이 끊어진 이 세상 최후까지
까악까악 브레이크 밟는 소리로 살아 남을
까마귀떼.
산업국으로 가는 길은 언제나 반듯하다
그대 슬픔의 뼈.
우리 기쁜 절벽.


*시집, 황야의 정거장, 문학세계사


 




빨래 - 서규정


네 그리움이 남아 있느냐
쉬었다가 익어간 탱자의 하늘이다
빨래가 쉬이 젖는 희망이라면
살아가는 절망 여태 마르지 않았니
소나기와 똑같은 빛으로 타오르기 싫어
척박한 등뒤에 사다리 같은 등뼈를 남겨 놓았다
내 눈에 채찍으로만 보이던 지평선이
푸른 탱자 눈망울을 팽이로 돌리고 돌리면
어지럽게 돌아보고 돌아보는 앞마당
빨랫줄을 타고 앉은 하늘이 우르르 쏟아져 내리고
포로로 잡혀 있던 선녀들이 너울너울 춤추며 있다
하나씩 골라 잡아 천년 만년 같이 살 선녀가
아니 아니 내 옷이더란 말이냐
그렇게 만나고 싶은 바로 그 사람이


 

 

*독자를 위하여

 

시와 노동

 

거리마다 각혈을 하던 거리의 시가 설마 그 장례를 치를 위기에 와 있다면 이제야 호박꽃 한 송이를 들고 나서려 하는 내 시는 파한 장터 어느 구석에 앉아 실향가를 불러야 할까. 그냥 오래오래 남아 있겠다.

달은 둥실 떠오를 테니까.

 

왕땀띠의 투구를 쓰고 처음으로 우리나라를 배운 것은 푹푹 찌는 여름의 대낮, 지도 없이도 찾아갈 수 있는 그 마을로 지평선이 목을 조를 때까지 달려가고 싶다.

 

노동자 계급에서 악필로 써낸 문학적 외곽시가 정감 있는 상식인의 눈에 가시로 남아주기를 은근히 희망한다. 만일 서정성이 바닥이 난 내 시를 고통스럽게 읽고 계신다면 당신께서 깊이 간직한 시심과 서정성을 바닥나게 빌려주실 것을 강요한다. 나는 객지를 떠돌면서 말을 배웠고 지금은 통도사가 가까이 있는 양산읍 유산공단에서 말을 죽이고 있다. 문학세계사에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