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화분 요람 - 박후기

마루안 2018. 6. 2. 22:41



화분 요람 - 박후기



이 작은 화분이 요람이로구나

아버지는 구근식물이었다

태아처럼 몸을 웅크린 채

이불 밖으로 겨우 팔을 뻗어

축축한 겨드랑이를

말리곤 했다


어두운 방구석

이불에 눌린 아버지는

압착포 속에 갇힌 오징어처럼

쌀자루와 함께 점점

홀쭉해져만 갔다

시든 꽃잎이 몇겹

광대뼈에 들러붙었다


사람들은 내 얼굴을 보고

죽은 아버지를 떠올렸지만

암만 거울을 바라봐도

아버지 얼굴이 생각나질 않았다

나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아버지는 무덤 속에서도

빚 독촉을 받았다

죽음도 세상을 끝내지 못했다



*시집, 내 귀는 거짓말을 사랑한다, 창비








폐광 - 박후기



아버지, 검은 입 벌린 채 눈감았다


나는 아버지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진달래꽃보다 늦게 병원에 도착한 나는 아버지 다리가 녹슨 레일처럼 구부러지지 않게 두 팔로 힘껏 무릎을 눌렀다


막장은 벽만 있을 뿐, 바닥이 없었다

발밑을 파내려가도 눈앞엔 검은 벽, 바닥은 어느새 궁륭이 되었다

아버지는 앞만 보고 살았지만, 언제나 뒤가 무너졌다


나는 뻬치카 옆의 카나리아, 연탄가스를 마시며 놀았다

구멍보다 틈이 무섭다는 것을 나는 안다


죽음의 생가(生家)가 텅 비어 있다






# 박후기 시인은 1968년 경기도 평택 출생으로 서울예술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03년 <작가세계>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종이는 나무의 유전자를 갖고 있다>, <내 귀는 거짓말을 사랑한다>, <격렬비열도>, <엄마라는 공장 여자라는 감옥>, <사랑의 발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