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오후만 있는 일요일 - 이서화

마루안 2018. 6. 3. 18:06



오후만 있는 일요일 - 이서화



일요일의 숫자들은

어느 곳에 끼워 맞춰도 잘 맞는다

장례식과 결혼식을 가리지 않고

모처럼의 늦잠과 낚시와 목욕탕의 뜨끈한 몸

일요일의 숫자들은

무릎 나온 오후에도 딱 들어맞는다

몇 건의 계약이 풀리고 아무리 꽉 묶어도

핑계들은 제멋대로 느슨해진다

직장이 사라지고 약속들은 몰려다니고

배달 오토바이 소리가 휴일처럼 분주하다


신들이 복무하는 날

주일에서 시작되는 달력 속 빨간 날짜

그 옛날에는 아마 눈과 비도

빨간색 혹은 파란색으로 내리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파란 열매와 빨간 열매들은

얼마나 오래된 일요일의 숫자들일까


사과가 일요일의 색깔로 익는다

꽃이 일요일의 색깔로 피었다

사과의 일요일과 꽃들의 일요일은 짧지만

무중력으로 유영하는

당신이라는 숫자


사과에 검은 별이 뜨고

벌레들은 사과 밖으로 나오고



*시집, 굴절을 읽다, 시로여는세상








안부 - 이서화



늙으면 정도 궁상맞아집니다

전기밥솥에 밥을 짓는다고

아버지는 주름 가득한 손으로 밥물을 잽니다


밥을 하는 것은 어떤 정보다 자작자작하기 때문입니다


겨울에 자리를 보전한 이는 직립보다

체중으로 걷는답니다

양손을 짚고 엉덩이를 움직이며 잠길 듯 말듯

손등 같은 잔소리를 합니다

햇살은 전기 코드를 꽂지 않아도 미지근해지고

팔순의 궁상은

밑반찬의 눅눅한 맛 같습니다


가라앉았던 아침이 부풀어 오르고

이내 뜸이 들기 시작합니다

뜸이 드는 동안 창문에 붙인 뽁뽁이 줄을 세어봅니다

어쩌면 사는 게 손을 대면 터지는

뽁뽁이 속 공기 같습니다


밥이 다 되는 동안

손으로 밥물을 재던 만큼 어느새 장독대에 눈이 쌓였습니다

손등에 오던 밥물, 꼭 그만큼입니다


모두 눈 속에 묻어두고 싶은 시간입니다

팔순의 아버지도, 아버지의 그이도

식후 내복약이

고요하게 삼십 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 이서화 시인은 강월도 영월 출생으로 상지영서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08년 <시로여는세상>으로 등단했다. 강원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16년 강원문화재단 창작기금을 수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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