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꽃, 남자 - 박수서

꽃, 남자 - 박수서 다행히 해는 무사하다 철지난 사내와 죽다 살아난 알뿌리식물이 투정처럼 서로의 황갈색 털을 비벼대며 함께 산다 무엇도 변하지 않는다 누구도 먼저 떠나지 않는다 세상은 폐역으로 우리를 지나간다 창문 밖 해가 목례하여, 꽃이 숨는다 사내가 꽃 끝에 빗살수염벌레처럼 들러붙는다 오늘은 참 좋은 날이라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다 크득 크득 사진기 플래시를 빵하고 터치니, 팝콘처럼 흰 울음꽃이 방안을 울렁거린다 더는 사내를 꽃 곁에서 목매달게 할 일이 아니다 더는 꽃을 사내 곁에서 놀아나게 할 일이 아니다 *시집, 슬픔에도 주량이 있다면, 북인 꽃배 - 박수서 마지막 여자처럼 사랑보다 더 헤프게 정주고 온 핏줄이 신경쇠약에 걸리고 나머지 열꽃도 우두둑 떨어지고 그 여자 물살에 떠내려가고 정말 아무렇..

한줄 詩 2018.06.18

그 집에 누가 살고 있을까 - 박순호

그 집에 누가 살고 있을까 - 박순호 순댓국을 기다리는 몇 분의 시간 맞은편 땟물 흐르는 벽에 삐딱하게 걸린 액자가 눈에 들어온다 늙수그레한 사내의 손에 들린 수저가 입안으로 들어가고 얼룩처럼 살아온 사내의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싸구려 그림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계단처럼 꺾인 계곡에서 한 발짝씩 내려오는 물의 유연한 걸음걸이 전나무일 것 같은 빽빽한 숲과 하늘 산비둘기일 것 같은 날개들 너른 바위 통나무집 낮은 굴뚝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 약초 캐러 갔는지 나무 하러 갔는지 어디를 봐도 인기척은 느낄 수 없고 역마살 낀 안개만이 떠돌아다닌다 어쩌면, 달그락거리는 세상의 소리를 귀담아듣고 있다가 그림 밖으로 나갔는지 모를 일 지독한 안개 숲을 떠나 멀리 출타중인지도 모를 일 큼직하게 썰어놓은 깍뚜기를..

한줄 詩 2018.0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