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찔레꽃 - 심종록

마루안 2018. 6. 14. 22:06

 

 

찔레꽃 - 심종록


누이를 다시 보았다
치솟는 전셋돈 감당할 수 없어
변방으로 쫓기듯 터를 옮긴 후였다
창신동 산 18번지 무너진 성곽 아래
최루탄 연기 안개처럼 짙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던 그해 봄
지붕 낮은 하꼬방에서
미싱을 돌리다 백골단에 쫓겨 들어온
앳된 사내 원단 속에 숨겨주고
사랑까지 했던, 아티반 스무 알의 오기로
능멸하는 현실의 손목을 그었던
스물두 살 외롭던 마음이 잉걸처럼 타올랐던
아비 없는 자식을 낳고
핏기 없는 얼굴에 땀방울만 선명하던
썰물 빠져나간 개펄처럼 악착같이 버티다가
돈 때문에 인연까지 끊었던 누이가 봄날 아침
찔레덤불로 피어 있다
소금 알갱이 같은 꽃 매달았다


*시집, 쾌락의 분신자살자들, 북인

 

 

 

 

 

 

소견서 - 심종록


1
사랑에 눈이 먼 사내는 오랫동안 포구를 떠돌았네

2
달이 구름 속으로 들어간다
날 벌린 가위 남성을 자르는
낙서 그려진 수협 공판장 뒤편
물그림자 어른거리는 전봇대에 기대서
쪽배처럼 흔들리는 사내
오랫동안 포구를 떠돈 흥신소 직원 같은 사내의
뒤통수에 문득 둔탁한 통증이 박혀들었다
인적 끊긴 시간이어서 가로등 불빛은 졸고 파도만 출렁이는
방파제 끝머리에서 사내는 가쁜 숨 움켜 쉬며 돌아서는데
날카롭고 둔중한 물체가 한 번 더 정수리를 찍는다
블랙아웃이 오고
바르르 떨면서 무릎을 꺾고 쓰러지는 사내의 뇌리에
반항은 무모할 뿐이라고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는
죽을 수도 없고 죽어서도 안 된다고
그러니 둘이킬 수 없는 치명적 상황은 만들지 말자는 생각이
섬망처럼 떠올랐다가 가라앉는다

사내는 정박하지 못하는 여자를 찾아 여기까지 온 것이다
영혼이 구름같이 자유로운 여자를
혼자 술 마시다가 노을처럼 허물어지던 여자를
세상에서 가장 도도하게 담배를 태우고
퇴폐영업소의 불빛처럼 쓸쓸하게 립스틱 바르던 여자를
이 포구에 프롤로그처럼 나타났다가 에필로그처럼 사라진 여자를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사랑했지만
정작 자신은 누구도 사랑하지 않았던 여자를 끝내 잊을 수 없어서
용서할 수 없어서 사내는
여기까지 온 것이다 환멸과 집착으로 굴러가던 생이
끝장날 줄도 모르고

3
반짝이던 별빛들이 얼룩처럼 희미해지는 새벽
수협 공판장 중개인이 출근 중에
골목에 드러누워 있는 사내를 발견한다
성질 급한 풀게 떼들이 시커멓게 몰려들어
싸늘하게 굳은 사내의 연한 부분을 물어뜯고 있다
경찰이 도착하고 사내를 처음 발견한 공판장 중개인은
하얀 천에 가려져 들것에 실리는 사내를 무심한 눈빛으로 배웅한다
아침노을이 먼 바다를 차례로 물들이고
배들이 통통거리며 돌아오기 시작하고
검시의는 둔기에 의한 외상성 뇌출혈이라 기록하고
퍽치기에 의한 우발적 살인이라고 경찰은
그날의 업무일지에 낙서처럼 끄적거린다

 

 

 

*自序

스물네 해 만에 두 번째 시집을 엮는다.
는개 내리는 이른 새벽에서 얼마나 걸어왔을까.

말들이
질척거리는 사막 넘고
거친 바람의 크레바스를 건너는 사이

한결 가벼워진 눈빛으로 계절을 순항하는 별들.

가을이다.

다음 생이 있다면
폭풍이고 싶다.
폭설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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