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풍바람 불어온다 - 김하경
담배꽁초 비벼 끄고
누런 얼굴의 사내가 트럭에 앉아 주스를 간다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산동네
알타이 사막을 떠돌 듯 또 쫓겨 가야 할 재개발 공약, 말초신경이 날카롭다
소라게 한 마리 허름한 집 한 채 등에 지고 엉금엉금 기어가는 오후
집을 내려 놓아야 한다, 서풍바람이 불고 있다
붉은 토마토 한 알이 한 끼의 생계를 간다 올망졸망한 식구가 갈리는 속도가 동그랗다 한 잔의 생과일주스를 사내의 먹이로 부어주는 여름, 믹서기 속 과일보다
더 밝아지고 싶은 사내, 플라스특 통이 무거워지면 얼굴이 어두워지고 그림자만 땅을 짚은 시간만큼 어둡게 눕는다 *한 줄로
단맛 배인 세상 머물고 싶은 자리가 이리 뱅글 저리 뱅글 돌아다니는 시간
과일 대신 그의 하루에 시간의 얼음을 살짝 넣고 돌린다
토마토보다 먼저 붉어진 꽃이 더 밝아지던 날
굴러만 다니는 타이어가 제자리에 옮겨지고 햇빛에 닿은 과일이 붉다
서풍바람 시원하다
아무도 보지 못한 모자 밑으로
*시집, 거미의 전술, 고요아침
거미의 전술 - 김하경
임대아파트 바닥에 물이 샌다
담쟁이 넝쿨 말라있는 줄기처럼 금이 쩍쩍 갔다
오랜 시간은 소리 없는 힘을 가졌나
독거노인 누웠다 일어난 자리에
임시로 누수를 막겠다는 사회복지사
방수액 바르고 벌어진 틈 사이 신문을 붙였다
뒤틀리고 단수된 심정은 허공을 휘젓고
습기 젖은 종이가 다시 갈라지는 시간
사람 온기가 떠난 뒤 장판 밑은 곰팡이 산실이 됐다
떠나야 할까, 말까
거미는 틈과 틈 사이 집을 짓고 있다
여기저기 널브러진 세간들마저 곰팡이가 생길 것처럼
험상궂은 바람은 방안으로 몰려왔다
거미도 그 틈에 집을 짓고 있다
무심코 지나친 시간도 삶의 무게를 싣고
볼 수 없던 힘은 허공에 시간을 불끈 쥐고 있다
시간의 불 켜고 비 피한 나이가 캄캄한 터널도 집이 될 수 있는 틈이다
나의 해묵은 오두막집 터널 속
마음과 마음이 돌아눕던 방은 태양의 절반만 보인다
눈살 찡그린 나의 오두막은
아직 온기가 남아있다
파랗게 곰팡이 낀 삶도
재생의 힘을 가진다
# 김하경 시인은 1964년 전북 익산 출생으로 2012년 <열린시학>으로 등단했다. 2014년 <공중그네>로 전국 계간지 우수작품상을 수상했다. 2015년 가을 첫 시집인 <거미의 전술>을 냈으나 몇 달 후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 유고 시집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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