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실낙원의 밤 - 김안

실낙원의 밤 - 김안 ​ 내가 만든 낙원과 당신이 만든 낙원과 우리의 낙원들이 만든 비참함과 우리의 낙원을 용서하는 밤 위로 쌓이고 쌓이는 다른 이들의 밤의 빛깔과 낮에 보았던, 밟혀 죽은 지렁이와 여왕을 배불리기 위해 지렁이를 해체해 옮기는 개미 떼 내일이면 우리는 이 낙원에 얼마나 남겨져 있을까 이리 와, 조금 더 내 안으로 들어와 누워 있어도 돼 창밖에서 우릴 쳐다보고 있는 저 사람들은 우리보다 빨리 늙을 테지, 늙어 죽거나 자살할 테지만 차라리 우리 똑같은 병으로 죽자, 죽어버리자던 낮에 보았던, 밟혀 죽은 지렁이 같던 당신의 입술과 우물우물, 씹어 삼키는 밤의 정충들 우리의 낙원들이 시간의 억센 손아귀에 질질 끌려가기 전에 기억이 찌그러들기 전에 차라리 우리 함께 저 창문 속으로 사라져버릴까 유..

한줄 詩 2018.06.17

그는 왼쪽으로 돌아눕지 못한다 - 최정

그는 왼쪽으로 돌아눕지 못한다 - 최정 -아버지 그는 머슴이었다 맨몸으로 농사지어 땅 마련한 억척스런 사내였다 다락방에 몰래 숨어 있다 끌려간 그였지만 사단 전멸당하고 기적처럼 목숨 건진 그였지만 6.25 아침 밥상마다 한밤중 마신 물이 알고 보니 사람 피였다는 둥 인민군들이 까맣게 몰려 왔다는 둥 그날의 전투 전설처럼 들려주었다 그리고는 며칠 말이 없었다 그에게는 비밀이 하나 있다 마을처녀 남몰래 좋아하던 그의 형님 인민군 무상몰수 부상분배 반가워하다 빨갱이로 몰려 총살당했다 그는 자식들 앞에서 허허 웃으면서 왼쪽 머리통에 총알이 하나 거꾸로 박혀 있어 왼쪽으로 돌아눕지 못한다고 했다 그의 일부가 된 머리통의 총알처럼 형님 비명 쇳덩이처럼 박혀 있는 것을 모른다는 듯 허허 웃으면서 *시집, 내 피는 불..

한줄 詩 2018.06.16

영안실 - 김익진

영안실 - 김익진 겨우 삼일만 머물다 간 그 방에도 문이 있었다 삼일만 머물다 가야지 철문 굳게 닫고 세상과 단절한 채 입을 꼭 다물었다 세상 것들 모두 가슴에 담은 채 합장으로 누워있었다 그 짧은 동안에도 우리는 문 밖에서만 머물렀고 그는 철문 안에서 구차한 입을 다물었다 겨우 삼일만 머물다 갈 텐데 옷깃을 여민 채 언 몸으로 찬 입술을 정리했다 말하지 않아 세상에 있었던 일들이 굳게 닫혀졌다 삼일만 머물다 간 그 방에도 철문이 있었다 *시집, 회전하는 직선, 조선문학사 죽음 - 김익진 늘 곁에 있었지만 보질 않았고 늘 속삭였지만 듣질 않았다 가깝게 다가왔을 땐 느끼질 못했고 가자 할 땐 딴청을 했다 기어이 가자 할 땐 거절할 수 없었다 *책머리에 회전하며 직선으로 꽃 피고 꽃 지는 것을 보면서도 나는..

한줄 詩 2018.06.16

저, 낙타 - 김수우

저, 낙타 - 김수우 내내 마른 목젖으로 신기루를 걸어 닿고 싶은 데 어디일까 저 낙타는 보지 못한 초원을 그리워하는 법이 아니라고 제 마음에 미리 말해 두었는지 빈 하늘 첩첩 껴안고 넘는 모래 언덕 그 몸 안에 침묵의 사원을 지었다 사원의 뒤뜰에서 발효되고 있는 이름 어떤 바람으로 피어나려는 걸까 멀리 사람들이 서성인다 평생을 걸어도 마지막 무릎을 꿇을 곳, 결국 사막 한가운데임을 되뇌는 걸까 자유란 모랫길만큼 지루한 지평이라고 제 마음에 미리 말해 두었는지 그 몸밖에 잿빛 봉우리 하나 일어선다 콧잔등에 묻은 노을을 긴 속눈썹으로 걷어올리는 저 낙타 눈망울에 잠긴 저녁 하늘이 깊다 곧 별이, 풀 씨 같은 별이 뜨리라 *시집, 당신의 옹이에 옷을 건다, 시와시학사 천장(天葬) - 김수우 가끔 잡아먹은 산..

한줄 詩 2018.06.16

울음의 난해성 - 이용헌

울음의 난해성 - 이용헌 한낮의 그늘 속에서 매미가 운다. 매미는 제 몸보다 큰 울음보를 투명한 날개 밑에 둔 까닭에 일생동안 울음을 감추지 못한다. 몸 밖으로 나온 울음들은 천지사방 그늘을 퍼뜨리고 그늘이 닿는 곳마다 무가내하로 무너지는 적요 고요의 끝자락엔 그늘보다 먼저 슬픔이 드리워져 있음을 매미는 알지 못한다. 한낮의 땡볕 아래서 나무가 흔들린다. 나무는 제 이파리보다 큰 그늘을 무거운 둥치 아래 가둔 까닭에 한 발자국도 걸음을 떼놓지 못한다. 뿌리로부터 전해오는 미동들은 나이테 깊숙이 속울음으로 저장되고 속울음이 터질 때마다 그늘을 당기며 일어서는 바람 그러나 바람의 나부낌이 뿌리의 속울음이라는 것을 나무는 알지 못한다. 한낮의 나무 아래로 사람들이 서성인다. 사람들은 나무보다 짙은 그늘을 두터..

한줄 詩 2018.06.14

말씀의 내력 - 김일태

말씀의 내력 - 김일태 고등학교 진학해 시골집 떠나던 날 차부 배웅하시며 나의 흐린 인사 끝에 꼭꼭 매달아 소금처럼 댓잎처럼 당신 대신 딸려 보낸 말씀 -큰 아야, 우쨌기나 송곳 같은 이빨 맷돌같이 갈며 살 거래이 제대로 세상을 송곳같이 찔러 보지만 맷돌이 되어 보드랗게 빻아 보지도 못했지만 항시 뒤끝 흐린 날 촛불처럼 귓바퀴 환하게 밝히는 어머니 말씀 *시집, 코뿔소가 사는 집, 시와시학 냄새 나는 가계(家系) - 김일태 식당하고 화장실하고 뭣 땜에 먼지 아나? 냄새가 나니까! 어제 제 아비 따라 집으로 왔던 여섯 살 난 조카딸아이가 해 준 말 할아버지 제사 파젯날 아파트 뒤 숲길을 걸으며 멀리 두는 것이 잘 먹고 잘 버리는 것인가 먹고 싸는 일 따로일 수 없는 이유 더듬어 보는데 더럽다며 버리는 누구..

한줄 詩 2018.0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