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세상이 어두워질 때 - 최준

마루안 2018. 6. 14. 22:04

 

 

세상이 어두워질 때 - 최준


개는 다른 개의 싸움에 관여하지 않는다
개는 다른 개의 죽음에 슬퍼하지 않는다
개에게는 슬픈 추억 따위가 없다
개는 슬픈 추억 따위는 만들지 않기 때문에
개는 슬픈 추억으로 고통받는 일이 없다
그래서 개는 늘 현실 속에서 산다
그래서 개의 울부짖음은 현실 속에서만 들려오고
곧 잊혀져 버린다 너무도 쉽게
개는 현실을 떠나보낸다
개는 세월이 저를 그리로 데려가 주리라고 믿는다
세월이 데리고 가는 거기가 어딜까를
개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둠이 올 때
개는 그 어둠을 내부에까지 끌어들인다
개가 어두워질 때 이 세상은 어두워진다
어두운 세상 한 곳에 웅크려 개가 잠들면
우리는 그 개의 잠울 깨우지 말아야 한다
개가 선잠을 깰 때 세상은 더 어두워진다
잠 깬 개의 컹컹 소리는
이웃의 잠든 다른 개들을 깨운다
다른 개의 싸움에는 절대로 관여하지 않으면서
다른 개의 죽음에는 전혀 슬퍼하지 않으며서
개는 개의 컹컹 소리에만 컹컹거린다
개는 개소리만 용하게도 알아 듣는다


*시집, 개, 세계사


 

 



마루 밑 세상 - 최준


마루 밑에서 산다
누구 한번 들여다봐 주는 일도 없이
개는 마루 밑에 혼자서 산다
빛이 없어서 미안하다
마루밑 세상
흙먼지와 고독
밤새 혼자서 이를 갈다가
잠이라도 청해 들면
개는 무슨 꿈을 거기서 꾸는가
어떻게 고쳐볼 수 없는 현실 속에서
개꿈이라도 꾸며 사는가
원천적 고독과
능동이 거세된 삶의 고통으로
개는 마루 밑에서 밤을 지샌다
마루밑 세상
빛이 없으므로
개의 눈빛과 살의만 번뜩거린다
어둠이 계속되고 있을 때
마룻장 사이에서 차갑게 새어나오는
개의 신음소리를 우리는 듣고
오싹해진다
개는 마루밑 저의 세계를
좀처럼 보여주지 않는다
우리가 밤새 살아 있는 개와 다시 만날 때
개는 이미 마루 밖의 세상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빛이 없어서 미안하다
고요한 마루밑 세상
저 혼자 다스려가는
오래 누적된 흙먼지와
천성적인 고독의




# 최준 시인은 1963년 강원도 정선 출생으로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84년 <월간문학> 신인상에 시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개>, <나 없는 세상에 던진다>, <뿔라부안라뚜 해안의 고양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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