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나는 가끔 자습을 이렇게 부르지 - 채풍묵

나는 가끔 자습을 이렇게 부르지 - 채풍묵 선생 왈, 자위란 자기 스스로를 위하는 것이니 학문을 닦고 게다가 익히기까지 한다는 위선보다야 차라리 자신을 위해 하는 행위가 더 낫지 아니한가 평등하게 배운 대로 치자면 오늘날 우리들 공부란 아마도 자신에 의한 자신을 위한 자신의 자위행위 공부는 그리 근엄하지도 경건하지도 않은 것 아이들이 어른이 되기 위해 꼭 거쳐야 하는 것 그러므로 자습을 한다는 것은 자위를 하는 것이지 단지 이름을 붙인다면 야간자율학습 아침자율학습 조용히 하자 입으로 하지 말자 그렇다고 맨손으로 하지 말자 집중이 안 되면 연필 같은 도구를 사용하자 청결하게 하자 샘처럼 매일 솟는 온갖 주의점이 끈적끈적 감독을 한다 그러나 아무도 알맞게 하라는 주의는 주지 않는다 자습 대신 건강하게 땀 흘..

한줄 詩 2018.06.26

사랑, 때 묻은 껌 - 김이하

사랑, 때 묻은 껌 - 김이하 사랑, 한다고 말한다 웅웅거리며 사랑을 끌고 가는 전선들 웅웅웅웅 울었겠다 너무나 공허하므로 지구 그림자에 갇힌 달처럼 나도 어찌할 수 없으므로 나도, 사랑한다고 달려온다 웅웅거리며 사랑을 끌고 온 수화기에 이슬 맺힌다 메마른 입술로는 더 이상 사랑을 씹을 수 없으므로 그러나 이 슬픔이 눅눅한 사랑의 슬픔이 왜 이리 가슴에 갇혀 있나 갇혀서는 겨우 그대에게까지만 갔다가 기진맥진 돌아오는 사랑은 언젠가는 돌아오지 않을 이 몹쓸 사랑은 그래도 입안을 맴돈다 쓸쓸한가, 하면 달콤하게 내 생의 한켠을 채우고 화한 입안에 사랑을 다시 씹는다 사랑은 오래 전 벽에 붙여 둔 때 묻은 껌이다 *시집, , 바보새 그 여름 - 김이하 분꽃은 피었겠다 들창 아래, 여인숙 회벽에 기대어 낮게 울..

한줄 詩 2018.06.26

사랑이라는 것 - 이강산

사랑이라는 것 - 이강산 희망이라는 것 말복 더위로 지친 트럭 운전수 아버지의 목덜미에 어린 딸아이가 땀 흘리며 부채질 하는 것 슬픔이라는 것 남편 몰래 아이 몰래 찔끔 찍어내는 어머니의 눈물, 그 너머 이리저리 흔들리는 세상 같은 것 더디 해는 지고 한밤이 되어서도 뒤척이는 아이의 땀띠 위로 부채질하며 아내 머리맡에서 밤새우는 것 사랑이라는 것 아름다움이라는 것 *시집, 세상의 아름다운 풍경, 실천문학사 단풍 - 이강산 애써 들판에 나서야 가슴이 트이는 세월을 삽니다 계절의 변화가 놀랍다거나 황혼이 아름답다거나 어색한 표현을 떠올리며 얼음처럼 굳어진 감정을 두드리며 삽니다 내가 지우고 내가 깨뜨린 희망의 이름들이 모여서 안부를 나누고 마을을 이루는 그런 세월을 꿈꿉니다 절음발이 누이의 가을산이 절뚝절뚝..

한줄 詩 2018.06.26

포르노 배우가 꿈인 딸 - 박남원

포르노 배우가 꿈인 딸 - 박남원 아버지를 살해하기로 결심한 아들과 딸을 강간하려 마음먹은 아버지와 포르노 배우가 꿈인 딸들이 나란히 손을 잡고 걸어간다. 바람이 불고 눈이 오려나 지구가 부서지고 별똥별이 날리려나 드디어 아버지를 살해한 아들과 딸을 강간한 아버지와 포르노를 찍은 딸들이 태연히 손을 잡고 걸어간다. 바람이 불지 않고 눈이 오지 않는다. 지구가 부서져도 별똥별이 날리지 않는다. *시집, 캄캄한 지상, 문학과경계사 희망의 시신 - 박남원 노을이 술에 취해 쓰러져 있는 동안 희망의 시체들이 낙엽으로 뒹굴었다. 바람이 그것들을 데리고 골목으로 사라졌다. 사라진 골목으로부터 다시 바람이 불었다. 세상의 모든 고통도 눈물도 시간이 지나면 잊혀질 것이다. 술 취한 노을 곁에 마침내 쓰러져 오래 오래 ..

한줄 詩 2018.06.26

파파 염소의 노래 - 최준

파파 염소의 노래 - 최준 환생을 기다리며 살지 일생 언덕을 오르다 보니 내가 산 세상은 다함없는 노래였네 울음이었네 때로 노래가 되는 울음, 종종 울음이 되던 노래 생식과 양육의 즐거운 시간들이 몸의 안팎을 두루 흘렀네 나, 오늘도 언덕을 올라가네 이건 풀처럼 무해한 몸짓 환생을 위한 나만의 일탈, 아니면 모르겠네 나 자신을 향한 저항일지도 난 세상에서 부르던 노래 세상에다 함부로 던져버리지 않네 언덕 끝까지 데리고 올라가네 배우지도 않은 노래를 아주 잘 우네 아니, 배운 노래도 제대로 못 울면서 세월만큼 생도 기울어 마지막이 될지 모를 그리운 언덕 오늘도 올라가고 있네 내려오는 길이 지워져버릴지 몰라 자꾸 뒤돌아보네 *시집, 뿔라부안라뚜 해안의 고양이. 문학의전당 사원의 발자국 - 최준 해안 절벽 힌..

한줄 詩 2018.06.25

야적된 가슴 - 강시현

야적된 가슴 - 강시현 어제도 몰래 다녀온 낙천과 염세의 틈바구니에서 스물네 시간의 무게를 재봉질한다 순서대로 입 귀 눈을 단단히 잠그고 가슴만 남겨둔다 기쁨도 슬픔도 지나치면 눈물이 거꾸로 매달린다 입과 귀와 눈을 꿰맨 뼈들의 봉분 위로 역사의 줄기는 꽃을 내고 덩치를 키워왔으니 눈물이 거꾸로 매달리는 것은 참으로 옭은 일이다 나의 무기는 외로움과 기다림 태양의 불편한 빛이 찢고 간 너덜거리는 가슴을 어둠 속에서 대충 시침질하였다 뼈들의 봉분 위로 덧없이 야적될 슬픈 가슴을 *시집, 태양의 외눈, 리토피아 어떤 배우의 연기 - 강시현 납빛 여우털 같은 하늘이 내려앉던 날 파르스름히 머리 깎고 파리한 전(全) 생(生) 짊어지고 대사 속으로 엉금엉금 기어들어가 보지만 존재와 의식의 불일치 뱃가죽엔 힘이 없..

한줄 詩 2018.06.25

할미꽃 - 이태관

할미꽃 - 이태관 바닥만 바라보며 살아야 하는 생이 있다 인사를 하렴 저렇게 먼저 고개 숙이시잖니 바다가 비좁은 새우는 한 생을 허리 굽히고 살지 아이야, 꼬부랑 할머니가 꼬부랑 고갯길을 유모차 밀고 가는 사연을 아니? 무릎이 꺾였다면 다섯 목숨은 하늘만 바라봤겠지 밥술이라도 넘겼다는 건 허리가 굽었기 때문 오일장 돌듯 온 몸으로 바퀴를 굴리는 구부러진 생 하늘이 높아진다는 건 바닥에 가까워졌다는 것 비 내리면 그 비를 흰 등뼈 우산이 받치고 간다 오남매 기른 젖가슴 사이로 빗물이 샌다 쫄래쫄래 유모차가 그 뒤를 따르고 있다 *시집, 나라는 타자, 북인 자리 - 이태관 전생을 기억한다는 듯 산벚나무의 싹이 올랐다 머리 위로 구름이 흐른다는 건 싹 틔울 허공이 만들어졌다는 것 뼈가 단단해지면 몸피를 줄여 ..

한줄 詩 2018.06.25

참치 통조림의 일생 - 정덕재

참치 통조림의 일생 - 정덕재 상온에서 유통기한이 7년이나 되는 참치 통조림을 냉장고에 보관한다 멸균의 공간에서 냉장의 상태로 들어간 깡통은 심해의 어둠을 기억하고 있기에 전혀 외롭지 않다고 고백한다 한밤의 깜깜한 주방에 앉아있으면 냉장고 밖으로 울리는 참치의 꼬리짓을 들을 수 있다 메아리처럼 들려오는 소리는 불 꺼진 연습실을 배회하는 배우의 넋두리로 주방 안을 맴돌고 7년 동안 냉장고에 갇혀있을지도 모를 참치를 위해 나는 수시로 냉장고 문을 열고 닫는다 심해의 고독을 달래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참치와 깡통은 하나의 몸이 되고 있다 *시집, 새벽안개를 파는 편의점, 시와에세이 세상의 거의 모든 통조림 - 정덕재 고등어 꽁치 번데기 골뱅이 동원참치 오뚜기참치 사조참치 옥수수 깻잎 저염 처리해도 여전히 짜..

한줄 詩 2018.06.25

동로골 아이들 - 박철영

동로골 아이들 - 박철영 소 엉덩이에 이름을 새긴 듯 머리만 봐도 뉘 집 아인 줄 안다 방금 싼 쇠똥처럼 뭉직한 냄새가 머리에서 나기 시작하면 며칠 후엔 도장 버짐이 번졌다 그럴 땐 방앗간의 모빌유를 얻어다 바르면 그만이었지만 짓궂은 아이는 동네를 돌며 성한 애들 머리를 들이 문대곤 해 빡빡머리가 거뭇한 도장 버짐이 되어 동로골 아이라는 표시가 되었다 오십 너머 머리 더 환해진 친구들 그때의 흔적이 유달리 번들거린 걸 보면 천생 동로골 아이가 분명하다 *시집, 월선리의 달, 문학들 옥수역에서 - 박철영 소싯적 우린 달을 따고 싶어 했지 그때마다 뒤안 대나무가 하나씩 잘려 나갔고 마른 간짓대 끄트머리엔 환한 달덩이가 매달리곤 했지 허탕 차는 날도 종종 있었지만 우린 가슴에다 수천 개의 달을 따 모았지 병훈..

한줄 詩 2018.0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