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그 집에 누가 살고 있을까 - 박순호

마루안 2018. 6. 17. 21:10

 

 

그 집에 누가 살고 있을까 - 박순호

 

 

순댓국을 기다리는 몇 분의 시간

맞은편 땟물 흐르는 벽에 삐딱하게 걸린 액자가 눈에 들어온다

늙수그레한 사내의 손에 들린 수저가 입안으로 들어가고

얼룩처럼 살아온 사내의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싸구려 그림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계단처럼 꺾인 계곡에서 한 발짝씩 내려오는 물의 유연한 걸음걸이

전나무일 것 같은 빽빽한 숲과 하늘

산비둘기일 것 같은 날개들

너른 바위 통나무집 낮은 굴뚝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

약초 캐러 갔는지

나무 하러 갔는지

어디를 봐도 인기척은 느낄 수 없고 역마살 낀 안개만이 떠돌아다닌다

 

어쩌면,

달그락거리는 세상의 소리를 귀담아듣고 있다가 그림 밖으로 나갔는지 모를 일

지독한 안개 숲을 떠나 멀리 출타중인지도 모를 일

 

큼직하게 썰어놓은 깍뚜기를 한 입 메어 물고

더운 김이 피어오르는 순댓국을 허겁지겁 입속에 넣는다

 

 

*시집, 무전을 받다, 종려나무

 

 

 

 

 

 

그날 내린 비 - 박순호

 

 

1

황급히 머리핀을 가방에 쓸어 담는 노점상인

좌판을 고였던 벽돌, 나무상자, 널빤지를 담장 뒤편에 모아놓고

도로를 건너와 빗물에 축 처진 머릿카락을 쓸어 올린다

뒤통수에 묻은 나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힐끗 뒤돌아보는 그

사람의 눈과 눈이 마주친 순간이 얼마만인가

음식점 유리창에서 배어 나오는 아득한 습기 탓에 쓸쓸한 눈동자를 잃어버리고 협곡(峽谷)으로 사라진 굽은 등을 놓치고 말았다

 

2

전신에 푸른 결 세우며 각재들이 비를 맞고 있다

야트막한 처마 하나 없는 이곳

처마를 만들기 위한 변명처럼 어지럽게 널려있는 각재가 비에 뒤틀리고 썩을 것이 걱정되는지

온몸으로 빗물을 받아내며 자재를 추슬러 모으고 있는 인부

언젠가 강 하류에 버려진 부패한 물고기 신세라며 소주잔을 기울였던가

나의 우산은 그에게 처마도 되어주지 못한 채 빗속을 뚫고 지나갔다

 

3

생계를 책임질 자본의 면전(面前)에서 묵묵히 삶의 발길질을 잘도 참아왔다

중간의 틈새를 살피며 쥐새끼처럼 밥그릇을 잘도 지켜왔다

장하구나

그늘로 내몰리지 않기 위해 치욕을 견뎌낸 나이

평생 맑은 날과 근육을 믿고 사는 사람 사이에서

중간을 지켜내는 적막 사이에서

길게 내뱉는 한숨

주머니 속의 보랏빛 머리핀이 손에 잡힌다

 

 

 

 

 

*시인의 말

 

후미진 골목에 서성이는 별처럼 고단한 삶을 견뎌왔다고 말해야 할 것 같은데 미안하지만 아니다.

그러기에는 이 거리의 날씨가 흐렸고, 내가 사랑했던 것들은 모두 행방불명 되었다.

그때에도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 억지로 삶의 문법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까지도 한밤 중이면 내 육신이 지붕을 뚫고 나갈 만큼 거대해지다가 쌀알만큼 작아지는 정체 모를 혼돈을 겪고 있지만, 그래도 계절은 어김없이 바뀌어 주었고, 간혹 눈이 내려주어 견딜 만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시를 쓰지 못했다.

어쩌겠는가.

시를 향한 열정에 비해 시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이 간장종지만하여 꼭 그만큼 밖에 채울 수 없는 자괴감을, 시가 내 삶에 커다란 반전을 가져다 줄 수 있을까.

지상 위의 아스팔트와 많은 건물, 가벼운 인연과 거짓을 말할 수 었었으므로 나는 여기까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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