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어느 방에 관한 기억 - 문성해

마루안 2018. 6. 18. 19:24



어느 방에 관한 기억 - 문성해



가령, 출출한 소읍의 어느 식당
때마침 넘쳐난 손님에
주인장이 궁색하게 내준 하꼬방에
일행과 함께 든 적 있으신지
개어놓은 지 오래인 이불과
얌전한 철제 책상이 하나 앉아 있는
문 닫으면 오롯이 섬이 되는 그 방에서
주인장이 내온 뜨뜻한 칼국수를 받아본 적 있으신지
못에 걸린 낡은 청바지와
철 지난 핸드백의 주인이 누구일까 하는 궁금증이
칼국수에 고명으로 얹히는 그 방에서
우리는 이제 보통의 손님은 아니게 되고
찬찬히 우리의 가르마를 들여다보는 목단꽃 무늬 천장 아래
시답잖은 농을 버리고 앉음새가 조신해지는 것을 경험해 보셨는지
달그닥거리는 젓가락 소리로 그 방을 깨워보셨는지
언젠가 찬 골목에서
어깨 조붓한 그 방의 주인과 스친 적 있다는 생각도 해보셨는지
또 어느 날 우리처럼 그 방에 들어서
그 방의 역사를 대대로 이어갈
숟가락 소리들을 떠올려보셨는지
누대로 그 방을 먹여 살리는



*시집, 밥이나 한번 먹자고 할 때, 문학동네








잿빛에 대하여 - 문성해



조계사 근처
문 닫힌 겨울 승복 가게
옷걸이에 첩첩이 걸린 잿빛들이
푸줏간의 고기들 같다


집을 나오고
마음에게마저 가출한 몸뚱이는
이 밤 어디를 나한처럼 휘돌고 있나


저 빛깔만은 피해다녔건만 결국은
저 빛깔밖에 두를 게 없었다던
대학 선배가 생각나는 밤이다


모든 것을 태우고 남는
저 빛깔 속에는 탁탁 튀는 불꽃과
재의 냄새가 난다


밤의 경계가 없어진 잿빛들이
매캐한 어둠 속으로 흘러나가고
나는 하와이 어느 비치의 암자에서
불자들과 잘 놀고 산다는 선배의 풍문도 떠올린다


형형색색을 버리고
디자인을 버리고
노래를 버린 저
연기로 만들어진 옷들


넉넉한 품속에는
집을 나온 먼지들이 잘 스며들어 산다





*시인의 말


어릴 때는 편도도 붓고 신열도 앓고 했는데

이제는 그러지 않는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일도 없다

먼 데 가서도 집을 찾아 돌아올 줄 안다

지구살이가 봄에 잘 익어가나보다

그래도 아직은

별들과 기차와 따뜻한 산속의 양떼들을 위해

시를 쓴다

이 별에 오기 전의 기억을 더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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