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라다크 식으로 살기 - 유경희

라다크 식으로 살기 - 유경희 휴대폰을 잃어버린 날 라다크 식으로 살기로 한다 종이에 편지를 쓰고 우체국에 가고 답장을 아주 오래 기다리고 하루 한 끼의 식사와 남루한 몇 벌의 옷에 만족하고 인간으로 태어난 것에 감사하고 티베트 사자의 서(書)를 읽고 가판의 노인에게서 야채를 사고 꿀벌 한 마리를 살리고 지갑을 잃어버린 날 라다크 식으로 살기로 한다 씨앗을 심고 오래 기다리고 벌레와 나누어 먹고 *시집. 내가 침묵이었을 때, 문학의전당 노마드 - 유경희 초지를 찾을 수 없어서 집을 짓기 시작했지 바닥을 놓으니 땅의 노래를 들을 수 없었다 기둥을 세우니 풍경이 상처를 입는다 지붕 만드니 하늘의 소리를 들을 수 없어서 낮에는 갈 곳이 없었고 밤에는 무엇엔가 쫓겼어 내가 지상에서 바라는 것 하나 우루무치행 편..

한줄 詩 2018.06.24

수영장 목격담 - 김상철

수영장 목격담 - 김상철 솔직히 말해서 몸뚱이가 아름답다는 것은 만부당이다. 일시적이거나 특별한 경우 그럴진 몰라도 지금 내 눈에 보이는 것처럼 우리들 살 몸뚱이란 가늘거나 굵거나 짧거나 길거나 통상 엉망이다. 사장님, 선생님, 여사님의 체신은 어디 가고 털 벗겨진 닭처럼 겨우 동물계의 나약한 종의 하나일 뿐이니 저들에게 아니 우리들에게 무슨 영장의 힘이 숨어 있단 말인가. 노소 가릴 것 없이 태초의 어린 것들이 순한 양처럼 그저 물장구를 놀고 있다, 놀고 있는 것이다. 수영을 끝내고 각자 옷을 입고 액세서리 붙이고 호칭을 달고 저마다의 공간으로 문을 열고 돌아갈 때 벌거벗은 몸과는 비교할 수 없는 위엄으로 점잖음으로 아름다움으로 또 여러 가지 욕망의, 꿈의 방면에서 완벽해진다. 이것은 단순히 맨 몸뚱이..

한줄 詩 2018.06.24

나무와 두 아이, 두 사람과 나 - 박석준

나무와 두 아이, 두 사람과 나 - 박석준 집으로 돌아가던 중에 몇 년 동안이나 걷던 그 길을 돌아다보았다, 이사하는 날에. 내가 걷던 그 길에는 은행, 은행나무들이 있었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밤 내가 독백을 털며 스치던 말하지 않는 나무였다. 3년 전이나 되었을까. 그 길을 따라 고등학교 하나가 집으로 찾아왔다. 그 애는 혼자서도 잘 놀다가 밤이 깊었다며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나는 그 길을 따라 출근을 했다. 체 게바라, 기형도, 김광석의 이야기와 내가 갖고 있는 물건을 다 좋아하다가 어느 날부턴 그들과 관련된 이야기와 물건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게바라 라이터, 입 속의 검은 잎, 사랑했지만...., 사랑했던가. 그러다가 그 애는 이삼 년 사이에 청년이 되었다. 길을 찾던 그 청년, 비를 맞고..

한줄 詩 2018.06.24

꿈꾸는 둥지 - 이자규

꿈꾸는 둥지 - 이자규 겨울 동안의 뿌리가 퍼 올린 노동으로 깨어난 가지들 밤샌 싹눈이 붉다 별빛 가까운 좁은 방 내 꿈의 무정란은 하냥 날개만을 기다리다 줄 핏발 선 알 속의 마지막 주문 탁탁 피 묻은 어둠에서 깨나고 싶다 남새밭을 가로지르는 나비의 생애 팽팽히 담아 숲의 소리 절로 푸르른 하늘 문 밖 갈퀴바람 발목을 내려치거든 흔들리면서 흔들림마저 흔들어주면서 낮게 흐르는 도랑물 오랑캐꽃 얇은 웃음 따라 죽은드끼 살고 싶어라 *시집, 우물치는 여자, 황금알 단풍 - 이자규 알겠네, 기다리지 않아도 편지는 도착하고 계절의 중력은 몸을 낮추어 녹슬어가네 비워질 세상을 미리 알고나 있었는지 이동설계를 긋고 있는 다람쥐는 나무숲 사이를 굴러다니다 떨어져 죽은 동료의 두 귀를 세우네, 들리는가 흐느끼는 안개를..

한줄 詩 2018.06.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