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그 무렵 - 황학주

마루안 2018. 6. 24. 19:45



그 무렵 - 황학주



휘이 외로웁고 뜨거운 육성을 떠듬거리고
있었다.
젖은 담요를 뒤집어 한 자리를 치고
대한 교구 공업사 목재 창고 바닥에서
거무틱틱한 얼굴, 나는 머리털을 기르고
빛처럼 꿰뚫는 연장을 하나 생각하고 있었다.


보안등 불빛이 어금니처럼 창고를 물고 있는 빗속으로
반벙어리 사방을 막막한 수평선이
술기운처럼 퍽 눈 앞을 질러오고
소리 한 점 불 한 점 정확하게 단
배 하나 시동 걸고 싶었기에.


어느 순간은 모든 세상의 윤곽이 어둡고 멀어
나와 나의 다음 인간마저 걱정이 되었다.


빳센 합판의 힘줄을 톱질해내고
끼워넣은 그 창문 앞에서
두꺼운 손바닥같이 볼품없이 딱딱한 소리라도
스스로 마주 쳐서
짧은 뱃고동 소리가 되었으면 했다.
어차피 모든 원양(遠洋)의 살과 피는 홀로 다치고
홀로 싸매는 일가(一家).
나도 정신의 한 구석을 혼자 빠개 무어라 말해야 하는
빛이었다.


그 무렵에 처음 깜깜한 입 안을 쥐어뜯기 시작했는데,
넘어지듯이 병장 제대를 하고 나와서
답답한 혀와 입술을 가장 아프게 생각했었다.



*시집, 사람, 청하출판사








뚝길에서 만난 노인을 위한 노래 - 황학주



어느 호된 빗줄기 지나는
그대 한 자리 표를 끊고
철석철석 물이 들어오는 법성포 낮은 길목에 와
손녀에게 배워 몇 마디 말도 고치는
가장 묵묵히 끝나는 일과.


그대
발 내린 고역이던 바다
짠내 흘러서 이름난 사람 못 되었고
한 눈물에 앉혀 약속을 걸었던
반려의 꽃송이 하난
벌써 이파리의 유리창을 닫았고


신발 젖고 강추위 오는
여기 어디에서
여러 따뜻한 혈육 빼앗겼으나
가장 가슴에 바짝 찍어 꺼낸
두 줄기 눈물
아픈 팔뚝 위에 부수었으나


돌아갈 날엔
적게 가져서 부끄럽지 않을 것.


늙은 삶이 내주는
닫힌 암실에 들어가 빼낸 난폭한 외로움과
고마운 낡음이
일상의 두 쪽 날개로 날아가고


끊어진 담배를 파이프에 재우며
손녀 연필 끝 속에 든 새들 한입씩
푸르게 노래하는 것을 보는
그대 두 눈의 잔웃음은
살아온 맑은 물을 쓸어안고 있다.


여보
젊은이,
어느 날의 하선자(下船者) 이름들을
하나씩 끌고 가버리는 세월의 흰 선박 앞에서
구설수 뒤얽힌 인류의 빵 속에서
넓은 아픔의 두 손으로 저어 온
저 피어 있는 뜨거운 노을의 바다.






# 황학주 시인은 1954년 광주 출생으로 세종대 국문과와 한양대 교육대학원, 우석대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다. 1987년 시집 <사람>으로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내가 드디어 하나님보다>, <갈 수 없는 쓸쓸함>, <늦게 가는 것으로 길을 삼는다>, <너무나 얇은 생의 담요>, <루시>, <저녁의 연인들>, <노랑꼬리 연>, <모월모일의 별자리>, <사랑할 때와 죽을 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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