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세상의 모든 한 번 - 배용제

마루안 2018. 6. 24. 21:02



세상의 모든 한 번 - 배용제



비가 쏟아졌다
꽃들이 마구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처음 어깨를 두드리는 빗방울들은 단 한 번 나를 느끼곤 사라졌다


집집마다 저녁 식사가 준비되는 동안 늙은이들은 창밖을 힐끔거렸고 아이들은 장난감을 망가뜨렸다
무감각한 것들에게만 불이 담겨졌다


끝없이 제 색을 짓이기며 꽃이 지고 진 꽃 뒤로 처음의 꽃이 피어났다
나무와 늙은이들은 한 번의 늙음을 오래오래 견디고 있었다
곳곳에서 구조 신호처럼 돋아난 불빛들이 서로의 증오를 확인하며 달아올랐다 갑자기 세상이 밝아지고
한 번이란 결말에 이르자 서로 안부를 묻기 시작했다
마음들이 무너졌고
비가 쏟아졌다


세상의 모든 처음과 혹은, 모든 마지막과
모든 한 번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의 저녁이 되는 오늘



*시집, 다정, 문학과지성








고통의 자세 - 배용제



나무의 자세로 일생을 견디는 건 무슨 의미일까
수백 년 전의 구름을 밀며
오래 죽어 있던 느티나무가 사라진 자리를 본다


꿈결처럼 취한 몸을 일으킨 한낮,
한 나무의 일생에 대해 생각하는 건 무슨 집요함인지
아주 낯선 곳에서 잠이 깬 것처럼
이 세계가 생소해진다


자전을 멈춘 낮달 속에서
흰 피를 수혈받은 몇 날짐승들이 솟구친다
바람의 바탕에 버려지는 제 발자국들이 못내 서러운 듯
펄럭이며 울었다, 그러나
아무리 거친 비명도 바람을 건너면 노래가 되고 만다


지나는 사람들은 사라진 나무의 행방을 묻기 위해
공중을 두리번거린다
어쩌면 모든 뿌리의 거처가 허공일지도 모르는 이 세계의 한낮,


애정을 쏟던 아이가 떠나간 다음 날
비로소 없는 나무의 안부를 묻고 있다
나무는 나무의 자세를 이해했을까
어느 날 외계의 피를 수혈받은 그 아이는
전혀 다른 종류의 발자국과 이상한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다시 느티나무가 죽어간 속도에 대해 묻고 싶다
삶과 죽음의 자세가 똑같은
비명과 노래가 언제나 하나인
이 세계의 알 수 없는 고통을 그 아이가 이해했을까


주검처럼 서 있던 나무는 한순간 꿈결처럼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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