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모란공원 - 유경희

모란공원 - 유경희 한 소년이 태어나 마음속에 하나의 신념을 심고 그 신념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살다가 민주주의는 피투성이라는 것을 뼈마디가 골절되는 고통이라는 것을 지상에 적고 갔다. 삶과 죽음이 팔레트의 물감처럼 섞이는 허공에 청년 하나가 앉아서 우리를 본다 그가 아프게 몸을 바꾸고 있다 삶의 광장에 누구도 아니고 아무도 아닌 사람들이 모여서 낯설어서 해독할 수 없는 자기 삶을 들여다본다. 똑같은 북소리에 발을 맞추는 사람들을 허공의 그가 내려다보다가 더 고요한 곳에 있는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곳으로 시선을 돌리는 것이 보인다. *열사 시집/ 그대는 분노로 오시라/ 도서출판b 비명 - 이영숙 -모란공원에서 가까스로 차는 멈췄다 관성과 마찰력이 제로가 될 때까지 브레이크를 붙잡느라 콘크리트 바닥에 낯을..

한줄 詩 2018.06.29

가짓빛 추억, 고아 - 허수경

가짓빛 추억, 고아 - 허수경 관이 나가는 날, 할머니가 눈감을 때까지 불렀던 사위, 이모부는 돌아왔다 할머니가 사주었다던 바지, 일찍 온 저녁처럼 무릎께가 너덜거리는 그 바지를 입고 오른팔을 잃은 이모부는 밭 가장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보랏빛 뭉치를 하나 따서는 우적우적 씹었지 거리에서 잃은 팔을 먹어치우는 것처럼 빛은 세월의 칼로 철없이 우리의 혀를 동강 내었다 어느 날 슬플 때 빛은 무자비했나 어느 날 욕정에 잡힐 때 빛은 아련했나 어느 날 기쁠 때 가지는 사라져서 빛은 뼈 속으로 혼곤하게 스며들었다 그 뒤에 돋아나는 빛은 자지러지게 우는 갓 태어난 아이를 닮으며 사무치게 널 안았나 도둑질을 하듯 몰래 살았다는 느낌이 목구멍까지 꽉 차오를 때 가지로만 입속에 머물던 빛, 그 빛의 혀를 지금 내가 적는..

한줄 詩 2018.06.28

오래된 구두 - 김태완

오래된 구두 - 김태완 가지런히 놓인 구두 아버지가 돌아오신 모양이다 누추한 하루의 일과를 마친 아버지의 귀가는 늘 무거웠던가 어머니는 흐트러진 아버지의 고된 걸음을 가지런히 정리해드린 모양이다 뒤 굽이 마모된 흔적 왼쪽과 오른쪽이 서로 다르다 하루의 생업은 어느 한쪽을 결정하는 기로 같은 것 아버지의 아무렇게나 벗어던져진 구두 초췌한 상처를 품고 돌아온 저녁이면 어머니의 손길로 위로받고 싶었던 모양이다 거친 세상 앞에 참담하고 비겁하거나 비굴하게 견딘 흔적을 그렇게 가지런히 정돈하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꽃이 피지 않는 늙은 꽃나무를 어루만지는 어머니의 저녁이 다 되어도 가지런히 놓여있던 구두가 보이지 않는다 힘겹게 몇 송이 꽃 피어나던 날 아버지는 기약의 말씀도 없이 아주 먼 길을 가셨나보다 ..

한줄 詩 2018.06.27

그대의 전술 - 전대호

그대의 전술 - 전대호 아버지를 몰아낼 때 그대가 사용했던 전술 기억하고 있는가? 기계처럼, 시간처럼 그대는 아무것도 몰랐다 한 걸음 오직 한 걸음 그대는 한 걸음만을 알고 있었다 하늘을 바라보는 그대는 어느새 늙은 권투선수를 닮아 있고 귀만 아무 소용도 없이 밝아졌다 그대는 회상에 잠긴다 그때 신기하게도 배경음악처럼 그대의 오래전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그대의 아이들이 그대의 전술로 밀고 들어오는 것이다. *시집, 성찰, 민음사 옥함(玉函)의 면도날 - 전대호 가슴이 벅차올랐다 미로 속을 헤매다 죽은 백골들이 영웅을 보듯 우러러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벽들이 그렇게 쉽게 무너지리라고는 그 역시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광산용 드릴을 움켜쥔 두 손보다 가슴이 더 크게 떨려왔다 이렇게 쉽게 무너지다니 다 엉터리였..

한줄 詩 2018.06.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