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불여귀 ​- 정소슬

불여귀 ​- 정소슬 ​ 쩔쩔 끓는 한여름인데 그는 방에다 불을 수혈해야 산다 주워온 아카시아 둥치 도끼로 패 넣으며 손가락마다 박히는 연기에 눈물을 뺀다 그러던 그가 건네는 담배 받아 물고는 떠듬떠듬 말을 보낸다 호 혹시 풀과 머 먼지로 말아 만든 다 담배 피 피워봤냐고 구 군홧발에 짓이겨진 푸 풀포기 훔쳐 말리고 바 방다닥에 뒹구는 머 먼지 채워 자 장발장 채 책갈피 찢어 두 둘둘 말아 만든 다 담배..... 간신히 빼 문 창살 사이 장발장의 손모가지 뻐끔뻐끔 피어오르면 부모형제 죄다 찢기어 날고 그의 육신도 산산 찢어져 연기가 되어 날아다녔노라 했다 이제, 나이 가늠조차 어려운 화석 같은 몰골로 버려진 폐가에서 밤이슬 피하고 폐박스 모아 끼 때우며 사는 남자 피붙이 다 어디 사는지 머릿속에 남아 있지..

한줄 詩 2018.07.03

행방 - 김승종

행방 - 김승종 오랫동안 아무도 그가 떠돌이인지 몰랐네 겉멋들고 바람나 젊은 시절 출분해 거리에서 거리로 떠돌던 탕자 쉬임없이 떠돌아도 그래봤자 몇군데 도시를 그저, 가끔 그를 봐야하는 시장의 사람들은 그가 떠돌이인 줄 알게 되었어도 누구도 그를 미워하지도 반기지도 가여워하지도 비웃지도 않았지, 며칠을 전봇대 아래 쭈그리고 있거나 어디선가 만나 같이 흘러 들어온 미친 여자를 위해 구걸을 하여도 저마다 자신을 미워하고 사랑하며 가여워하고 비웃어야하니까 인생은 제멋대로 제멋으로 사는 거니까니, 까닭모른 채 버림받은 뒤 삯바느질하며 친정 근처 소읍에서 늙어가는 옛처의 창호지에 비친 그림자에 같이 살자 사정하다 퇴짜맞았다는 소문 돌아도 사람들은 침 한번 삼키지 않았지 오늘밤 그가 이곳으로 왔다 여전히 무심한 표..

한줄 詩 2018.07.03

느림을 위하여 - 홍신선

느림을 위하여 - 홍신선 시력검사 끝에 의사가 말했다 "늦은 편입니다 벌써 돋보기 썼어야죠" 벌써, 그렇다 벌써 몇 해 전 통근용 기차표의 좌석번호도 가판신문의 깨알같은 활자들도 망막 뒤로 혹은 옆으로 놀란 절족동물 그리마떼처럼 숨어서 잦아들거나 스멀스멀 기고는 했다. 일찍이 그리스 시인 호머는 눈멀어 살았다 적당히 시신경 망가뜨리고 뇌세포 수천 가닥의 칩 속에 고대 지중해 전역을 트로이 싸움의 뭇 선단들을 완벽하게 입력하기 위하여. 얼마 전 울진군 왕숙천변에 1.75도 돋보기 잃고 내 홀연 퇴화된 시신경에다 더듬더듬 입력했던 것. 사나운 떼거리 여름물 일시에 몰려 내려간 뒤 느릿느릿 환한 뭇 내장 드러내놓고 혼자서 기는 느린 외톨이 가을물의 덩치 큰 마음치수여! 망각의 바닥 틈에서나 그때 숨어서 잠적한..

한줄 詩 2018.07.03

미친 강물을 바라보며 - 김인자

미친 강물을 바라보며 - 김인자 폭풍 속 장마 지나고 다시 쏟아지는 빗속에 서서 흐르는 강물 오래 바라보았다 아무도 어떤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저 붉은 사랑 그리움의 미친 속도 황토 흘러가는 어지러운 강물 바다가 예서 얼마나 남았는지 반쯤 드러누워 아랫도리를 바닥에 묻고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는 어린 자작나무에게 머리 한번 쓰다듬어주며 잠시 쉬어갈 법도 한데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달려가는 강물 한때 내 그리움의 화려한 현기증도 세상 모두 휩쓸고도 남을 저 붉은 강 상처가 상처를 보듬고 간통하는 흙탕물의 미친 속도를 닮았던가 알고 보면 저것들 여리고 부드럽기 만한 황토들인데 저리 광폭한 속도에 휩쓸려가다 언제쯤 미친 그리움의 끝 굴곡진 바닥의 틈새라도 숨 가쁘게 어지러운 몸 조용히 내려놓고 쉴 수 있을까..

한줄 詩 2018.07.03

따뜻한 결별 - 최세라

따뜻한 결별 - 최세라 낯선 차고지에서 비를 긋는다 다시는, 이란 말을 끝으로 저수지 물밑에 쌓이기 시작하는 빗방울 때로 처마에서 떨어지는 물소리가 먼 데의 총성보다 무섭게 날아들기도 한다 그러므로 서 있는 자여, 포복 속사포에 무너져 확인사살을 기다리는 동안 깍지 낀 손 머리에 얹고 투항하는 나의 곁으로 백기처럼 하얀 개, 여러 갈래 물꼬 튼 기억들이 눈 밑 가득 붉게 흐른다 녹슨 오뉴월은 세월이 아니라 꿈이었던 것 마주보고 달려도 줄어들지 않던 거리는 그래서였을 것 몸 던져 바탕화면에 깔리고 싶던 모든 날 저문 채 둥지가 되어주지 못해 미안하다, 말들이 새 떼 되어 일시에 날아오른다 둑방 위로 둘씩 셋씩 나타나는 반딧불은 싸움의 신호탄이 아닌 종전의 축포 엎드린 채 하얀 개의 녹물을 닦아준다면 조금씩..

한줄 詩 2018.07.02

동행 - 우대식

동행 - 우대식 아버지가 입원한 날 밤부터 소쩍새가 운다 원주에서 평창, 장호원에서 서울, 사우디에서 평택에 이르는 먼 길을 잊지 않고 찾아온 새 오늘 병실에서 운다 오랜 유목의 삶을 살아온 아버지 그 가슴에 끝내 동행해야 할 하나의 소리가 있었나 보다 마디 가는 손가락이 가끔 경련을 일으킬 때마다 소쩍, 수액 맑은 물이 또옥 또옥 떨어질 때마다 소쩍 소쩍 아버지 몸속으로 들어가는 새들 딱딱하게 굳어가는 간을 쪼며 소쩍 소쩍 이제 다시, 아버지와 함께 먼 길을 동행하시는 중이다 *시집, 설산 국경, 중앙북스 학교 - 우대식 괴로움이 나의 학교였으며 배움이었다. 내 일체가 여기에서 나왔으므로 마땅히 저에게 감사해야 할 일이나 그 또한 마땅히 그러한 일이므로 크게 머리 숙일 필요도 없다. 괴로움이여, 한여름..

한줄 詩 2018.07.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