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늦은 저녁 모서리에 너를 낙서하는 날이 시작되었다 - 김왕노

마루안 2018. 7. 8. 18:30



늦은 저녁 모서리에 너를 낙서하는 날이 시작되었다 - 김왕노



언제 넌 내 가슴을 지그시 밟고 간 백 년 전 꽃잎이었던가.


내 마음 지층에 남겨진 네 발자국은
숱한 내 고열과 생의 무게로 눈부신 화석으로 남았다.
물방울 화석보다 더 고운 네 발자국에
내 뺨을 문지르며 아직도 네가 나타나지 않는 늦은 저녁 모서리에
너를 낙서하는 날이 시작되었다.


가로등 켜지는 나직한 소리가 내 발자국 소린가
깜짝깜짝 놀라는 사이사이로 계절이 지나가거나 비가 내리기도 했다.
낯선 문장이 서성거리기도 했다.


초승달에 마음 베여 흐느낄 때까지 나의 낙서 속으로 졸음이 찾아들 때까지
그립다고 했다가 그렇지 않다고 했다가
그럴지 모른다고 했다가 그럴 수도 있다고 했다가
시간은 증오마저 향기를 품게 하는데
언제 넌 내 가슴을 지그시 밟고 간 백 년 전 꽃잎이었던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뚜렷해지는 기억의 잎맥들
난 꽃잎을 그렸다가
네 얼굴을 그렸다가 보고 싶다고 했다가
그렇지 않다고 했다가 죽을 정도로 보고 싶다고 했다가
죽이고 싶도록 사랑한다고 했다가 널 만난 걸 후회한다고 했다가
심한 발작을 일으키는 추억을 다독거렸다가


저녁 모서리에 너를 낙서하는 동안에도
넌 내 가슴을 지그시 밟고 가는 지금도 그 백 년 전 꽃잎인가.
물기 머금은 듯 이 향기는
그리고 밤하늘에 무수히 마중 나온 저 별들은


나는 널 사랑하다가 죽여 버리려고 한 날들이 있었다.
너와 나는 서로를 통과해 멀어져 가는 안개라 한 적이 있었다. 서로를 축축이 적시다가는
내게 젖은 너를 뽀얗게 말린다고 바람을 기다린 적도 있었지만
이제 묻고 싶다. 내 안에 꽃잎의 발자국화석으로 남아 있는 너의 흔적들
언제 넌 내 가슴을 지그시 밟고 간 백 년 전 꽃잎이었던가.



*시집, 사랑, 그 백년에 대하여, 천년의시작








질타 - 김왕노



무너져야 사랑이다.
슬픔도 진화한다.
이별이 온 사랑이라야 더 아름답다.
격렬한 사랑도 없이 사랑이 가고
마음이 꼬이고 꼬였을 때
내가 뱉은 말이다.
등나무도
칡도
세월을 향한 질타를
꼬인 몸으로도 온통 푸른 잎으로 피워내었다.
이 시절 이렇게 푸른 것도
세상에 보내는
산천의 질타가 푸르게 타오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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