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선의 기적 - 여태천
나는 조금씩 멀어지는 시간에 대해 쓰고 있었지.
갑자기 흰 얼굴이 될 수 있을까.
우리가?
질문 같은 거 안 하면
차라리 그것은 지나친 시련
분명한 인식은 질문들의 끝을 통과하고
그러고 나서야 만들어진다는 것을
어젯밤 근엄하던 그 고양이가 쓰러지는 것을 보고 생각했지.
어쩐지 중년의 우리라고 써야 될 것 같아.
미안하지만
이름이 뭐더라.
그건 중요하지 않아
그것은 감정이 아니라 분별이므로
그 생각에 의지하면서부터
기억과 함께 두 손을 잃고 말았지.
고양이가 남기고 간 뻗친 수염은
먼 것과 가까운 것 사이를 오고 가던 저 열렬한 기침은
슬프게도
발아래에 있는데
우리의 고민은 좀체 내려올 줄을 모르네.
자꾸만 뭔가가 분명한 우리를 채우고
또 채우고 채우리라는 걸
우리가 텅 빈 풍선이었다는 사실을
이미 터져 버린
어젯밤의 고양이가 알려 주고 있는데도 말이야.
도대체,
*시집, 저렇게 오렌지는 익어 가고. 민음사
반성 - 여태천
어젯밤 당신이 취중에 한 말
한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윤리에 관한
무시무시한 말
무시하지 못할 그 말에
무엇이 그리 부끄러웠는지 모른다.
세상은 여전히 과도기라고
시계를 쳐다보며 나는 얼버무렸고
끝내 당신의 빛나는 얼굴에 내 입술을 맞출 수 없었다.
저버릴 수 없는 당신의 충고를
지키지 못한 것을 내내 뉘우치며
나의 결단이 부끄럽지 않을 내일을 위하여
그러한 믿음을 위해서
생각을 오래 쓰다듬는다.
당신의 빛나는 눈망울을 대신하여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을
또 다른 생각을
무딘 손이
할 수 없는 일이
할 수 있는 일이 될 때까지
당신의 너그러운 말의 씨가 내 안에서 싹을 틔울 때까지
생각이 웃자라
생각지도 못한 일로 커질 때까지
당신의 무시하지 못할 부탁을 위해서
이마의 주름을 만진다.
# 여태천 시인은 1971년 경남 하동 출생으로 고려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0년 <문학사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국외자들>, <스윙>, <저렇게 오렌지는 익어가고>가 있다. 2008년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했다. 동덕여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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