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괄호 안을 더듬거리다 - 김점용

마루안 2018. 7. 9. 12:09

 

 

괄호 안을 더듬거리다 - 김점용


비가 온다
빗소리의 음각 속
나 어린 형수의 볼멘소리 들린다
어무이요, 데련님 더는 못 데리고 있겠십니더
통 말이 없고 문틈으로 보면 무슨 짓인지....
부엌 뒷문에 교복이 숨어 있다
비가 온다
빗소리의 음각 속
아버지 외출한다
특별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 늦은 빗길
우산을 들고 교문 앞 불빛에 서성이는
배다른 형의 아내 형수의 흐린 눈빛
감당할 수 없다 울타리 개구멍으로 빠져
비 맞는 까까머리
엄마 나 집에서 다니고 싶어....
들리지 않는다
빗소리 거세지고
후두둑, 여름 방학이 지나간다
창문 틈으로 책가방 하나 보따리를 들고
씨 다른 누나네로 교복이 이사를 간다
비가 온다
이따금 천둥이 칠 때
아버지 웃으신다, 널 죽이고 싶어....
핏발 선 망막 가득
비가 더 오고
만가(輓歌) 속 술 취한 아버지 떠간다
울창한 빗소리에 잠긴다

용서를 배우기엔 너무 늦은 시간
비가 온다
몹쓸 추억들 팅팅 불어난다


*시집, 오늘 밤 잠들 곳이 마땅찮다, 문학과지성


 

 

 


오늘 밤 잠들 곳이 마땅찮다 - 김점용
-꿈 69


시골집이 바뀌었다 철 대문이 웅장한 나무 대문으로 바뀌고 지붕 슬래브에 붙은 기와도 밖으로 서까래를 이어 절집처럼 화려하게 단장되어 있다 아래채는 흙집 그대로 보수를 했는데 옛날 내 방은 당집처럼 꾸며놓았다 바닥엔 희고 울긋불긋한 종이 인형을 철핀으로 꽂아 가득 세워 놓고 천장엔 오색줄을 걸어놓았다 위채 내부도 궁금했으나 꽉 막혀 안을 들여다볼 수가 없다 그러고 보니 오늘 밤 잠들 곳이 마땅찮다


1
내 방에 가고 싶다
날마다 들어가는 내 방 말고
언젠가 네가 와서 나란히 눕던
내 방에 가고 싶다.


2
들어가도 늘 바깥인 집
세상의 방들은 눈송이처럼 하얗게 떠다니다
내 머리 위에 어깨 위에 구두 끝에서
금세 녹아버린다

아버지,
무덤 좀 열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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