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저녁의 관용어 - 현택훈

마루안 2018. 7. 7. 22:24



저녁의 관용어 - 현택훈



이제 슬픔을 거둬들이지 않으면
플라타너스는 이내 물기에 젖어
축축해질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의 관용어들
차가운 슬픔처럼 무거운 것도
없다 오늘도 한낮엔
자동차들이 참 부드럽고
건조했다 불빛으로 반짝이는
저녁의 관용어들 해는
수정맨션 너머로 지고
바람은 호주머니 속에서
일렁인다 말랑말랑했다가 다시
딱딱해지는 라디오 그리고
암막을 짊어진 채 사거리에서
머뭇거리는 저녁의 한 페이지
언젠가 읽은 듯한, 골목길의
보안등이 켜지고 두 시간 전의
혼잣말 검고 어두운
휘파람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나는 안녕을 발음해본다
결국엔 마침표의 음각을 새길,
포스트잇 한 장이면
충분한....



*현택훈 시집, 지구 레코드, 다층








연안의 밤 - 현택훈



오늘은 또 누굴까
슈퍼 앞 낡은 평상 위에 누워있는 한 사내
검붉은 얼굴이 낯익다
술을 진창 마신 게다
고된 밤바람이 불어온다
한 때 푸른 꿈을 갖고서 도시를 찾았을 사내
이리저리 밀리고 밀려 바닷가에 와서
작은 어선을 타고 있는가
짠 바닷바람이 상처에 스미는지
사내는 얼굴을 찌푸리며 몸을 뒤척거린다
저 별빛을 따라가면 시암만에 갈 수 있을까
폐호흡도 이제 지치고
바다 속을 헤엄쳐 인도양까지 가볼까
사내는 꿈속에서 고래 한 마리가 된다
별들은 수평선 너머로 흐르고
스산한 마음은 곶이 되어 바다로 손을 뻗는다
발밑에는 산호초로 뒹구는 푸른 소주병
깊어가는 부두의 밤하늘 아래
평상 위에서 외로운 헤엄을 치는
술고래 한 마리
바람이 밀물처럼 불어와 고래의 눈가를 적신다
내 비닐봉지에 든 소주병 속 바다가 출렁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