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돌아가다 - 최서림

마루안 2018. 7. 20. 19:50



돌아가다 - 최서림



그곳에 들어가려면 흑백사진을 통과해야 한다.
LP판으로 배호, 남진, 나훈아를 돌려야 한다.
까까머리 동무들과 학교 땡땡이 치고
송사리랑 도시락 나눠먹던 그곳으로 들어가려면,
슬레이트와 콘크리트가 점령하기 전 봉인된 시간 속으로 돌아가려면
두꺼비랑 헌집 주고 새집 받는 모래사장을 건너야 한다.


시간이 개울물처럼 돌고 돌다가
낡은 영화 필름처럼 멈추어서기도 하는 그곳으로 돌아가려면
풀무치와 나란히 낮잠을 즐기는 원두막에 들러야 한다.
참외 서리쯤 슬쩍 눈감아 주는 사람들 앞에서
명함 내놓기 머쓱해지는 그곳에 끼어들려면,
살구나무 성벽을 지키고 있는
깐깐한 참게와 가재가 문을 열어주어야 한다.



*시집, 시인의 재산, 지혜








나이 - 최서림



백합은 젊어야 백합이자만
호박은 늙어서도 호박이다.


속이 꽉 찬 애호박보다
속이 텅 빈 늙은 호박이 더 달큰하다.


늙은 호박 안에는 달맞이꽃만이 아니라
방울새도 버들치도 살고 있다.


늙은 호박을 싣고 온 저 노인의 쭈글쭈글한 몸속에
고향의 산과 강이 따라와 슬며시 고개를 내밀고 있다.


아직 늙어보지 못한 서울의 아이들이
늙은 호박과 노인을 고대 유물인양 보고 지나간다.





# 최서림 시인이 일곱 번째 시집을 냈다. 시인도 어느덧 환갑을 지나 적당히 쓸쓸한 중년을 넘어서고 있다. 시인이 맑은 영혼을 가졌음을 말해주는 시인의 말이 시리게 다가온다. 이 사람은 천상 시인이다.


시인의 말


마지막까지 살아 빛나는 것은
눈물처럼 썩지 않는 말들,


혀끝의 독이 삭아 약이 될 때까지
내 안의 죽은 말들이 살아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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