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슬레이트지붕 파란, 그 집 - 황학주

마루안 2018. 7. 17. 22:17



슬레이트지붕 파란, 그 집 - 황학주



슬금슬금 서어나무숲 너머 길도 없이 깊어지는
그런 장맛비 올 때


구부정한 등을 못 보았을까
무엇이라고 해야 하지 빗발, 그런 살대들이라도
생의 바람벽을 붙들고 있긴 있었다고 해야 하나
그 등이 일생 흘러내리고 있었다고 하면 어떻겠는가
논가 부들군락지에 친할머니 집은 있었다


내 마음 진흙에 흐르는 물
내 마음 진흙 뼈를 밟아주는 물
다시 한 번 찾아가 물 아닌 것들만을 넌짓 타들이고 싶은


딩동, 하고 누르면 빗소리가 쏟아지고
서랍마다 시시콜콜 물소리가 차 있는
이를테면 물로 된 방이 몇 칸 있는 친할머니 집에선
홀로 물들이고자 했던 세상의 테두리가 나오지 않았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이불 홑청의 소나무와 두루미 수를 세본 사람 없고
미농지에 싸두었다 주던 과자의 이름을 아는 자라야
심부름 다니던 빗소리밖에 없다


누가 보았을까
서어나무숲 너머 아무나 올 수 없는
슬레이트지붕 파란 집
늘 한약냄새가 나야 했던 물의 시간들의
몸인 듯 부들 등유 램프 천지인



*시집, 노랑꼬리 연, 서정시학








고향 - 황학주



해가,
묻히듯
갓 익은 복숭앗빛 산 뒤로 넘어간다


하얀 마당의 뒷장을 침 묻혀 넘기면 참 멀리까지 갔다 오는
저 건너편 나비


무덤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족보를 건네받는다
이런 여름날,
칼 같은 지느러미가 지나가는 마당
급하고 미끄러운 슬픔들의 어미가 선잠에 들 때까지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제 자신의 바닥까지 휘어진
생의 화장을 고치는 노련한 산그늘


콩밭에 나비 접근하듯
할아버지 아버지 차례로 무릎을 안고
독방 구덩이로 빨려 들어간 참이다
그림자빛 꽃 가까이 간 저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