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껍질 속의 고리 끊기 - 김정수

마루안 2018. 7. 19. 22:55

 

 

껍질 속의 고리 끊기 - 김정수


숨 넘어갈 듯한 기침 소리에 먼지 머금은 세월이
울꺽 올라왔다. 쓰레기통 비워 배 채운 식구들
비누처럼 깨끗했지만 하늘엔 그물이 많았다.
아무리 펼쳐도 새끼손톱만한 웃음조차 걸리지 않는
깨진 창이, 몰려오던 환한 아침을 찢었다.
집안은 늘 퍼렇게 멍들어 있었다. 평생 굽은 허리 펴지 못하고 살았건만
늦은 귀가 때마다
한참을 대문 앞에서 망설여야만 했다. 가로등은
왜 그리 밝은지 물 머금은 돌멩이라도 던져,
몸 감추고 싶었다. 비록 산동네 판잣집에 살망정
세상은 바로 보고 싶었다. 그러나
세상이 기울어져 있었다. 가로등 아래 서 있던 리어카는
폐차 된 지 오래. 골목에 쓰레기가 넘쳐났지만
이미 그의 몫은 아니었다.
병원 한번 가보지 못한 채 그가 죽자
멍든 계란을 깨뜨렸다.
노란 슬픔이 흘러나왔다. 다신 멍들지 않는, 둥근 고리의.


*시집, 서랍 속의 사막, 천년의시작

 

 

 

 

 

 

정다운 이웃 - 김정수


사람은, 사람의 운명이란 순식간에 바뀌는 것이다.
40이 넘도록 홀아비였던 그는 아내를 맞이하고부터 여자보다 더 좋아하던 술을 끊었다.
그의 아내는 술집 작부였다. 비록 면사포는 씌워주지 못했지만
알뜰히 모은 돈 탈탈 털어 살림살이를 마련했다.
늦바람은 무서웠다. 늦은 아침, 피곤한 연기가 간신히 담장을 넘었다.
담장을 넘었던 연기가 다시 굴뚝으로 회귀할 때쯤
자식을 갖고 싶은 욕망으로 입에 술을 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술집 작부였던, 나이 먹은 그녀의 몸으로
아이를 갖는다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육신에 황혼이 찾아올 때면
포기할 것은 포기해야 하건만, 술에 취하지 않으면
그만큼 양순한 사람도 없었다. 술이라면 이골이 난 그녀였지만
그의 주사는, 처음 몇 번은
같이 악다구니를 써가면서 싸워도 봤지만 그가 부엌에서 식칼을 들고 나온 뒤부터
화장실에 숨거나 이웃집으로 도망쳤다.
그럴 때마다 그녀의 눈은 음부陰部보다 더 시퍼렇게 멍들어 있었다.
고함소리가 차츰 잦아들어 이윽고 조용해지면
도둑고양이처럼 집으로 숨어 들어갔다.
한두 번은 무사히 지나갔지만 멋모르고 숨겨줬던 정다운 이웃들은
식칼을 들고 쫓아온 그의 행패에 기겁을 하고 난 뒤부터
그의 집에서 기침소리만 조금 크게 들려도
대문을 걸어 잠갔다. 그때마다 놀란 이웃집 아이가 자지러졌다.
화장실도 안전하지는 않았다. 도피처가 되지도 못했다.
짧고 날카로운 비명이 들린 지 얼마 후
그의 울부짖는 소리가 온 동네에 가득 찼다. 그러나
눈을 똑바로 뜨고 주위를 돌아봤을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후회란 얼마나 사치스러운가 음부 같은 낮달
서녘 하늘에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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