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들판의 권력 - 이우근

마루안 2022. 4. 14. 22:01

 

 

들판의 권력 - 이우근

 

 

꽃은,

자기 자리가 좋으면 얼른 씨를 뿌려

그 자리를 내어주고 홀연히 사라진다

계절을 넘어 더 좋은 꽃으로 피고

들판은 무상으로 임대를 내어주고

 

그 대부분의 배경과 풍경인 잡풀들은

더욱 생식력이 좋아 더불어 번성하면서

혼자인 듯, 모두 다인 듯

어깨동무할 이유가 없지 않아서

그 아래의 자잘한 것까지

거듭 거두어가며 지평을 넓힌다

창백하나 검소한 겨울이 가면

본능적으로 포실한 봄이 오는

없어도 많은, 넘치는 공간

순환이 순한 곳

 

그것이 들판의 권력

 

널브러져 있는 사소한 것들

미세하게 산소를 공급하는 존재들

잊혀진 것들

그러나 아무도

평등이나 계급을 요구하지 않으니,

 

그 충만한 무욕(無欲),

구름의 미끄럼틀이라 낄낄거리고

바람의 정거장이기도 해서,

그냥 오줌 막 누고 싶은 들판

그렇게 갈망이 팽팽해도 해소가 되는 곳

그러한 마음의 권력이 들판이지.

 

 

*시집/ 빛 바른 외곽/ 도서출판 선

 

 

 

 

 

 

음악다방 - 이우근

 

 

나, 스무 살

유치원 보조교사

야간대학 1학년

직장 끝나고, 수업 끝나고

길을 잃고 다방에 들러

음악신청 했어요

서울, 너무 먼 당신에게 쓰는 편지

하지만 이 고통 참 적당해요

우리 동갑내기, 동시대의 가치를 무얼 알겠어요

사랑, 참 싫어요

아프니까

다만 고전(古典)이 아니더라도

유행가이긴 싫어요

음악에 익사했다가 까무록 졸다가

마지막 버스를 타러 가요

그렇게 시작인 우리를 나는 믿어요

싸구려를 부추겨 고귀함이 되고

천박함이 영화가 되지 않기를

바라고 바라며

지금, 이 가난, 극복하리란 예감,

살면서 살아요

그건 필연이죠

잊혀진데도 말이에요.

 

 

 

 

# 이우근 시인은 경북 포항 출생으로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15년 <문학.선>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개떡 같아도 찰떡처럼>, <빛 바른 외곽>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