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푸른 것들의 조그마한 항구 - 배한봉

마루안 2022. 5. 26. 21:37

 

 

푸른 것들의 조그마한 항구 - 배한봉


옥상에 상자 텃밭을 만들었다.
밑거름을 넣고
상추며 들깨 모종을 사다 심었다.
일주일에 두세 번 물을 준 것 뿐인데 어느 새
잎이 손바닥 만해졌다.

한 잎씩 채소를 거둬들이는데
푸릇푸릇 콧노래가 실실 새 나왔다.
부자가 이런 것이라면,
삿된 생각 한 점 들지 않고
그저 옥상에 동동 떠다니는 실없는 웃음을
데려와 웃거름으로 얹어주는 것이
행복이라는 재산을 불리는 일이라면
나는 엉뚱한 곳을
오래 기웃거린 것이다.

아하, 웃음이라는 배의 조그마한 항구
금은보화 싣고 출렁이는
볼록한 종이가방에서
푸른빛 환하게 흘러나오는 시간과
싱긋싱긋 계단을 걸어 내려오면
내 이마에 걸리는 초여름 건들바람이
수확한 상추, 깻잎 쌈밥만큼 달달했다.

 

 

*시집/ 육탁/ 여우난골

 

 

 

 

 

 

꽃 심는 사람 - 배한봉


늦은 봄날 한낮에
도로변 화단에
늙수그레한 사람들이 쭈그리고 앉아 꽃모를 심고 있다.

저들은
일 하는 마음일까
꽃 심는 마음일까.

그곳을 지나며 나는
일하는 사람과 꽃 심는 사람의 생각 차이에 대해 생각한다.

기쁠 것도 없고 슬플 것도 없는 꽃들,
그리고 얼굴이 따가운 봄볕,
볕을 등지고 모자를 쓰고 꽃모를 심지만 얼굴에 땀방울이 맺힌 현실.

고단함과 굴욕은 삶 어느 구석에나 다 웅크리고 있는 것이다.

나는 식은땀이 흐르는 내 이마를 훔친다.
돈을 벌지 못하는 생활은 애처롭고
꿈은 나비가 파닥거릴수록 투명하게 반짝거리는 거미줄처럼 아름답다.

꽃과 늙수그레한 사람들 사이에서 나의 눈길은 흔들린다.
꽃을 심을 때 심중을 퍼 올리면
두레박에 담긴 감정들은 어떤 물맛일까.
육체에 수시로 사막이 들어서고, 또 사나운 비와 바람이 수시로 몰아치는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
나도 꽃 심기를 할까.
꽃을 심으면 현실은 내가 꽃 심는 까닭을 가족에게 뭐라 말할까.
일하는 사람에겐 기계가 놓여 있고, 첩첩 서류뭉치가 놓여 있고, 땡볕 속의 노동이 놓여 있을 것이지만,
꽃 심는 사람에겐 물 호수가 샘터일 것이고, 햇빛은 무량의 열망일 것이라고,

꽃 심을 때만큼은
낭만도 잊고, 고민도 잊고, 번잡한 현실을 뚫어지게 바라보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일러바칠 것인가.

초라할 것도 없고 장엄할 것도 없이 도시 도로변에 피어 있는 꽃들.
현실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들.

저들은 아침 일찍 집을 나서며 일하러 간다 했을까, 꽃 심으러 간다 했을까.
늦은 봄날 한낮을 지나며
나는 나를 생각한다.
비겁을 애처로움으로 포장한 것은 아닐까.
생각 복판에 심기는 꽃모들. 지루한 고민처럼 따가운 햇볕 위에 또 햇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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