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시력(視力), 또는 바코드 - 강시현

마루안 2022. 5. 22. 21:45

 

 

시력(視力), 또는 바코드 - 강시현

 

 

새벽에 널 안아 주고 오길 잘했다

거친 열대의 밤이 흘러갔다는 것을

내 몸에 무수히 박힌 숨구멍의 눈들이 모두 목격했다

 

오후의 깃발을 구청 공무원이 거둬 갔는지

바코드의 바람은 물컹해졌다

최신 가요와 술병이 나사처럼 조여진 유흥가의 흥취는 밝아 왔고

무연분묘의 헝클어진 뗏장처럼 네온사인이 뒷골목에 투숙했다

꿈이 없어 음악이나 하고 싶다고

노래방 주인은 흥얼거리며 빈 맥주병 박스를 쌓는다

 

경계 밖에선 누구나 무모함의 주먹을 쥐고 흔들었으나,

간절함이 사라진 거리에 이내 세금이 매겨지고

감시 카메라의 눈알이 불거졌다

 

첨벙대던 약속들, 그 불발의 결과물이 모여서

바코드 숲이 바람에 나부꼈다

애초에 약속 같은 건 없었고,

때 묻은 절망이 희망을 곁눈질하는 사이

노래가 없었다면 벙어리나 될 듯이 벽마다 악보가 떠다녔다

 

안경알에 담긴 미소를

오래 못 보거나 자세히 보지 못하는 것은 포유류의 잘못이 아니다

겁먹은 지문이 통장 잔고에서 미끄러질 때마다

손톱에는 생계형 바코드가 찍혔으니까

퉁퉁 불어터진 라면발같이 광통신의 약속은 느렸고

저녁의 어깨에 밤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정신이 또렷해지는 쇼팽의 녹턴이 안방을 유턴했다

어둠 속에서 낯선 어둠이 저벅거리며 걸어 나와 열대야를 순찰 중이었다

 

간직하던 꿈은 얼마짜리였는지

시간의 유속과 절대성은 오로지 너는 별것 아니라는 자각으로 내몰고,

맨살을 타고 바코드에 저무는 희미한 안개 지역으로

다신 걸어선 안 되겠지

 

 

*시집/ 대서 즈음/ 천년의시작

 

 

 

 

 

 

박스의 통증 - 강시현

 

 

혼백이 빠져나간 허름한 육신 같은

엄숙한 북방의 장례 같은

늘 그 안이 궁금했는데

 

길과 시간이 사라진 박스 안,

인기척이 살고 있었다

똑똑 노크하니 동거하던 어둠이 문을 열어 주었다

 

박스 안은

주거 부정의 푸른 사상이 앞다투어 도주한 면적만 남았고,

혁명 따위 빈 박스 안에 갇혀 버렸다

 

직립보행의 시간들이 무거워

살아남으려 발버둥 쳤다는 아픈 진공,

박스의 세월은 늘 배가 고팠는데

컹컹컹 허기의 달빛을 보고 짖으면 서쪽 하늘에

핥아서 반들반들한 별들이 떴다

 

무겁고 어둑한 세상을 이끌었던 것들 모두 바람을 닮아

속이 비고 허리가 굽었는데

박스의 통증에는 무정부상태가 지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