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불시착 - 최백규

마루안 2022. 5. 22. 21:37

 

 

불시착 - 최백규


활주로 끝에 소년이 서 있다
 
그어버릴게 번지듯 퍼뜨려지자 우리는 영원하지 않을 거야 우리 없이 살아갈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죽어갈 거야 시동을 걸자 걷다가 질주하자 손을 흔들며 위험하도록 소리치면서

꿈에서 친구를 죽이고 자퇴하겠다는 애인을 달래다가

머리를 넘긴 채 식물원과 미술관을 걷는다
손차양을 한 아이의 뒤통수를 쓰다듬고 있자면
몇백년 전 당신과 이곳에 다녀간 내가
가지런히 덮을 옷을 지어 살고 있다
대공원과 경복궁에 나비가 있다는데 꽃밖에 보이지 않고
여름을 밟는 걸음이
곱다

이 순간을 위해서 그렇게도 많은 친구들의 무덤이 필요했던 거구나

등을 맞대고 자야 하는 자취방에는
마른 욕실이 있다
절룩거려도 깨진 적 없는 당신의 무릎을 안으며 흰 발을 만져 주던 일이 오래다
그런 삶
아무도 우리를 해치지 않는

국경을 허물어 폭설 속에서 한없이 연착되고 싶었다

평일 내내 손등으로 떨어지는 찬물을 맞으며 그릇만 씻었다
서걱거리는 우유를 시리얼에 붓고
종이 위에 그려진 얼음을 손수건으로 훔치기도 하며
마룻바닥을 쓸다가
발목에 혈관이 뛰어 징그러워 잘 봐둬 나중엔 뛰고 싶어도 못 뛸 때가 온다
늙은 개를 오래 발음하듯이

살이 나간 선잠을 접던 당신과

휴일의 숙소는 아무렇게나 벗어 놓은 백사장 같다 헐거워진 몸에서 나도 모르게 떠내려가면 어떻게 하나
악력이 희미해지는 계절이 와도 여전히 손을 잡고 있을까
아무 걱정 없이
석양에 물든 아이들이 철길 건너편으로 달아나는데 전선 위 늘어선 새떼

맑은 죽이 끓어 넘친다 몇년 후에 다시 사랑하자 했을 때 다음 생에도 이미 폐허라는 걸 알았다

꽃을 먹고 죽으면 나비로 태어난다는 미신을 믿었다

오래된 착륙이었다

 

*시집/ 네가 울어서 꽃은 진다/ 창비

 

 

 

 

 

 

화사 - 최백규

 

 

서로의 숨을 놓아줄 때가 온 것 같다

 

순한 절기에 죽고 싶었다 무심히 닳은 연골을 붙들다 떼면 서서히

 

부풀어 오른다

 

심장은 앞으로 몇번이나 더 피를 내쉬어줄까

수건을 적시다 기척이나 발작이라도 끌어안아보던 해가

헌 옛날이다

 

가벼운 찬거리를 다듬으며

서투르게 마음을 짓고 앙상한 뼈마디를 맞추어보는 일 베란다 너머 먼 곳으로 흩어졌다가

이부자리 깊숙이 뛰어내리는

 

동백을 꺾고

뼈를 줍는다

 

속옷이 미지근해질 무렵

지긋이 익은 물집마저 누그러진다 주인 없는 옷가지와 그릇에 앉은 먼지가

낡아지고 있다

 

부르면 없을 것이다 이제 빛바랜 바람과 헝클어진 웃음소리도 구분할 수 없다

 

입술을 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