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봄이 하는 일 - 류시화

마루안 2022. 5. 27. 21:47

 

 

봄이 하는 일 - 류시화


부드럽게 하고, 틈새로 내밀고, 물방울 모으고
서리 묻은 이마 녹이고
움츠렸던 근육 멀리까지 뻗고
단단한 껍질 부수고
아직은 약한 햇빛 뼛속으로 끌어들이고
늦눈 대비해 촉의 대담함 자제시키고
어린 꽃마다 술 달린 가리개 걸어 주고
북두칠성의 국자 기울여 비를 내리고
울대 약한 새들 노래 연습시키고
발목 겹질린 철새 엉덩이 때려 떠나게 하고
소리 없이 내린 눈 물소리로 흐르게 하고
낮의 길이 최대한 늘리고
속수무책으로 올라오는 꽃대 길이 계산하고
숨겨 둔 물감 전부 꺼내 오고
자신 없어 하는 봉오리들 전부 얼굴 쳐들게 하고
곤충의 겹눈에서 비늘 벗기고
꽃잠 깨워 온몸으로 춤출 준비하고
존재할 충분한 이유 찾아내고
가진 것 남김없이 사용하고
작년과 다른 방향으로 촉수 나아가게 하고
주머니에서 '파손 주의' 꼬리표 붙은 희망 꺼내고
자잘한 상처들 위로 빛 쓸어내리고
처음 온 곳인데 돌아왔다는 느낌 들게 하고
봄이 되려면 당신도 이만큼 바빠야 한다
당신은 세상이 꽃을 피우는
가장 최신의 방식이므로

 

 

*시집/ 꽃샘바람에 흔들린다면 너는 꽃/ 수오서재

 

 

 

 

 

 

곁에 둔다 - 류시화


봄이 오니 언 연못 녹았다는 문장보다
언 연못 녹으니 봄이 왔다는 문장을
곁에 둔다

절망으로 데려가는 한나절의 희망보다
희망으로 데려가는 반나절의 절망을
곁에 둔다

물을 마시는 사람보다 파도를 마시는 사람을
걸어온 길을 신발이 말해 주는 사람의 마음을
곁에 둔다

응달에 숨어 겨울을 나는 눈보다
심장에 닿아 흔적 없이 녹는 눈을
곁에 둔다

웃는 근육이 퇴화된 돌보다
그 돌에 부딪쳐 노래하는 어린 강을
곁에 둔다

가정법의 그물에 걸린 물고기보다
가진 게 희망뿐이어서 어디서든 온몸 던지는 씨앗을
곁에 둔다

상처에도 불구하고 사랑한다는 말보다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한다는 말을
곁에 둔다